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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 아이 핑계 대고 부모가 읽기 ‘딱’! '...한시 이야기'

입력 | 2002-07-25 16:02:00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 갈래머리 소녀가 꽃을 향해 손을 흔든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의 표지 그림이다. 제목이나 표지, 초등학생인 아들 벼리에게 아빠의 목소리로 쓴 서문을 읽어보면 분명 이 책은 어린이용이다. 그러나 어린이용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첫번째 이야기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읽기 시작했다면 열아홉 번째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까지 한시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 수 있다.

저자 정민 교수는(한양대·국문학)는 오늘날의 한시를 가시덤불이 우거져 막혀버린 길에 비유했다. 그 가시덤불을 헤치면 오솔길에는 아직도 향기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바람결을 따라 옛사람들의 목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온다. 저자는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이 길을 지팡이가 되어 독자를 이끈다.

첫번째 이야기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은 왜 시를 짓고 읽을까라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중국의 대철학자 노자가 스승 상용(전설 속의 인물)이 숨을 거두기 직전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청하자, 스승은 입을 크게 벌렸다. “내 입 속을 보아라. 내 혀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내 이가 있느냐?” 이가 다 빠진 입을 보며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 “알겠느냐?” “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겠습니다. 이빨처럼 딱딱하고 강한 것은 먼저 없어지고, 혀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저자는 노자를 인용하면서 “시도 상용의 말처럼 직접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돌려서 말하고 감춰서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저도 모르게 느낌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느낌과 깨달음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이것이 한시의 미학이다.

두 번째 이야기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에서 시와 그림이 어떻게 하나인지(시는 모양이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다)를 보여준다. 중국 송나라 때 휘종이 ‘꽃을 밟고 돌아가니 말발굽에서 향기가 난다’는 시제를 주고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모두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를 어떻게 그릴까 쩔쩔매고 있을 때 한 화가가 그림을 제출했다. 말 한 마리가 달려가는데 그 꽁무니를 나비 떼가 뒤쫓아가는 그림이다. 젊은 화가는 나비 떼로 꽃 향기를 대신한 것. 저자는 이렇게 설명을 붙인다.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뛰어난 화가는 그리지 않고서도 다 그린다. 훌륭한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다 말한다. 좋은 독자는 화가가 감춰둔 그림과 시인이 숨겨둔 보물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찾아낸다. 그러자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한 줄 두 줄 기러기 一行二行雁

만 점 천 점 산 萬點千點山

삼강 칠택 밖 三江七澤外

동정 소상 사이 洞庭瀟湘間

열일곱 번째 이야기 ‘간결한 것이 좋다’에 나오는 시인 이달의 ‘김양송의 그림책에 써주다’는 시다. 설명은 하나도 없고 단어만 나열한 이 시를 어떻게 감상할까. 삼강과 칠택, 동정과 소상은 중국 남쪽 지방에 있는 유명한 호수와 강물의 이름이다. 김양송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림책을 보며 이달이 그림에 어울리는 시 한 수를 지어 적은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한 줄인지 두 줄인지 기러기가 날아가는데, 만 점인지 산은 많기도 많다. 삼강과 칠택의 바깥 같기도 하고 동정호와 소상강 사이 같기도 하다”는 의미. 그러나 시는 말을 아낄수록 뜻이 깊어진다. 저자도 설명을 아낀다. “좋은 시는 절대로 다 말해주지 않는다.”

‘한시 이야기’는 본책과 부록, 두 권이 한 쌍이다. 본책에는 우리말로 옮긴 한시만 싣고 한자는 나오지 않는다. 부록은 한시 원문과 책 속 등장인물에 대한 간단한 해설이 실려 있다. 한시 원문 옆에 한 글자 한 글자 뜻과 소리를 적어 한자에 익숙지 않은 세대가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었다. 애들이나 보는 학습서라고? ‘한시 이야기’는 아이에게 읽히려다 부모가 먼저 감동할 책이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정민 지음/ 보림 펴냄/ 본책 192쪽, 부록 72쪽/ 1만2500원

< 김현미 주간동아기자 > khmzip@donga.com

◇ Tips

이달(1539~1612) : 조선 중기의 시인, 호는 손곡. 홍주 사람 이수함의 서얼이다. 당시풍을 배워 백광훈, 최경창 등과 더불어 삼당시인으로 불렸다. 문집으로 ‘손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