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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대덕밸리의 공부벌레들]갑갑할땐 도자기 구우며 쉰다

입력 | 2002-07-25 16:05:00

장인순 한국원자력연구소장(왼쪽)과 임채환 블루코드 사장 [사진=전영한기자]


대덕밸리에는 도룡동 등 17개 동에 6만6000여명이 산다. ‘깔끔하고 산뜻하다’는 것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의 첫 인상이다. 예쁜 연구소 건물들과 조형물이 즐비한 데다 녹지비율을 80%로 정해 둔 때문이다. 계룡산 국립공원이 배후에 자리한 영향도 크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고급인력을 끌어들이는 지역의 중요조건의 하나로 이런 자연 조건 외에 예술문화 인프라를 꼽았다. 대덕밸리의 문화 인프라는 거주민 수에 비춰 넉넉한 편이다.

대덕밸리 안팎으로는 차로 15분 거리 안에 다양한 예술문화 시설이 있다. 밸리 내에 엑스포아트홀, 가족용 영화 등을 상영하는 대덕과학문화센터, 클래식공연 등이 열리는 충남대 국제문화회관이 있다. 밸리 남쪽 갑천을 건너면 바로 대전시립미술관이다. 그 옆에는 대전 예술의 전당이 오픈을 기다리고 있다.

대덕밸리 내에 단란주점과 비디오방은 없다. 밸리 내 상업지역에 노래방이 서너군데 있을 뿐이다. 충남대와 한국과학기술원 사이 궁동의 호프집 거리가 유일한 주점가다. 특별법인 대덕연구단지 관리법이 있으며 대덕연구단지 관리본부가 새로운 건물의 입주 심의를 하는 영향이 크다. 이 같은 환경 때문인지 사람들의 여가 생활도 담백한 예술문화 취향이 강하다.

●공룡다리 밑의 간이 연주회

24일 오후 8시 미생물과 인공토양 실험 시설이 즐비한 바이오벤처 인바이오넷 사옥 1층 로비. 대덕밸리 곳곳에서 모여든 연구원 엔지니어들과 그 가족 100여명이 모여 네덜란드 출신 첼리스트 피터 비스펠베이, 미국 예일대 음대 교수 함신익씨를 둘러싸고 앉아 있다. 대전시향 지휘자이기도 한 함씨는 이튿날 충남대 국제문화회관에서 열릴 연주회에 관해 설명했다.

“내일 들려드릴 곡 중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1번에 대한 비난으로 5, 6년간 막막한 침체기를 보내다가 내놓은 곡입니다. 악장마다 강철과 순금이 안팎에 배어 있지요. ‘내 이제야 작곡가로서 찬란한 부분을 보여주겠노라’는 의지 같은 게 들어 있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3악장을 들어보면 이런 각오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이어 비스펠베이씨가 레퍼토리 중 한 대목을 들려주자 로비는 박수갈채로 가득하다. 세계적 첼리스트와 지휘자의 이같은 공연 ‘맛뵈기’는 전례가 드물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대전시향의 연주회가 열리기 전이면 클래식음악 애호가인 과학기술자들과 함씨는 지질연구소의 공룡 다리 밑,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실험실 옆 등 대덕밸리 곳곳에서 만나 클래식 음악에 대해 묻고 답해왔다.

반도체 제조설비 관련업체인 블루코드 임채환 사장은 아침마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 습관이 있다. ‘색소폰 부는 의사회’에 나가 재즈 듣는 것도 즐긴다. 그는 지난해말 대덕밸리 사람들이 중심이 된 대전시향 후원회 ‘높은음자리표’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매번 연주회가 열릴 때마다 500여석을 차지한다. 임 사장은 “내년이면 후원회원들이 1000석 이상 객석을 채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휘자 함씨 역시 “여러 아이디어들을 실험 삼아 내놓고 있다”며 “호응이 눈에 보여 1년 중 3개월은 미국에서 대전으로 건너와 산다”고 말했다.

●과학과 미술의 만남

대덕밸리 전자통신연구원(ETRI) 김현빈 박사는 금속공예를 전공한 부인 때문에 미술에 관심이 크다. 일본 오카야마에서 유학하던 때는 두 딸의 손을 잡고 미술관 들르는 일이 잦았다. 7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미디어 아트’전의 경우 심포지엄에 패널리스트로까지 참여했다.

한국과학기술원 배석형 박사는 동료들과 어울려 틈날 때마다 미술관을 찾는다. ‘미디어 아트’ 전에서 눈여겨 본 작품은 반짝이는 발광소자들을 캄캄한 전시실 벽과 천장에 촘촘히 꽂아놓은 오스트리아 작가 어빈 레들의 ‘매트릭스’.

3차원 형상을 컴퓨터 모니터상에 구현하는 연구를 하는 그는 “발광소자들이 어둠 속에 만들어낸 공간을 보면서 과학과 다른 예술 차원의 공간에 대한 느낌이 퍼뜩 다가왔다”고 말했다.

벤처기업인 에이펙 송규섭 사장은 대덕밸리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의 계룡산 도예촌을 보름에 한번꼴로 찾는다. 직원 30여명과 함께 도자기를 만든 적도 있다. 그는 “실험 기자재와 회계 자료에 둘러싸여 살다가 초벌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기쁜 마음이 된다”고 말했다.

지니텍 이경수 사장은 도예 취미를 비즈니스에 활용한다. 그는 “외국 바이어들과 함께 도예촌 내의 후소도예원을 찾곤 하는데 그때마다 일이 잘 풀렸다”고 말했다.

젠포토닉스의 한선규, 베리텍의 한미숙 사장도 ‘도예파(派)’다. 일류기술의 남승엽, 인바이오넷의 구본탁 사장은 가족과 함께 도자기 만드는 일을 즐긴다.

●‘지식’을 넘어서는 예술적 상상력

한국원자력연구소 장인순 소장은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핵(核) 전공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에 따라 미국에서 스카우트해 온 이다. 그에게는 핵 이미지와 다른 낭만적인 데가 많다. 연구소 정문의 아름드리 고목 나무 둘레에 커다란 원형 벤치를 만든 것을 연구 업적 만큼이나 자랑으로 삼는다. 대구의 문인모임 ‘시(詩)사랑’회 고문이기도 한 그가 매년 사들이는 150여권의 책 가운데 절반은 시집이다. 장 소장은 “아이오와대 유학 시절 가끔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며 “그때마다 시를 읽는 것이 탈출구였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김용택 정호승이나 프로스트, 라즈니쉬 등 국내외 시인의 시들을 복사한 인쇄물을 주곤 한다. 그 맨 앞장에 장 소장 자신이 쓴 글은 이렇다. “지식은 제한됐으나 상상력은 우주를 품는다.”

그는 “과학은 자연의 섭리를 찾는 여정”이라며 “이같은 여정은 예술문화의 순수성과 상통한다”고 말했다. 대덕밸리의 예술문화 취향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대덕밸리 뉴스 사이트인 대덕넷(hellodd.com) 취재팀장 구남평씨는 “이곳 과학 기술자들은 담백, 소탈하다”며 “여가 역시 쾌락 문화로 시간을 탕진하기보다는 무언가 생각을 맑게 하는 것으로 보내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대전시립미술관 박일호 관장은 “미술관은 대전시민 전체를 위한 것이지만 대덕밸리의 문화를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며 “최근 몇 년간 ‘과학과 미술’을 테마로 한 기획전에 수만명이 다녀간 것은 이곳 과학기술자들의 여가 문화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대덕밸리의 과학기술자들은 홀로그램 레이저 프로젝터 센서 등이 어우러진 이 미술관 특유의 기획전들을 통해 과학의 틀 바깥에서 생각의 전환을 맞아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한편 대덕밸리와 인접해 정부 대전 청사의 공무원 등이 살고 있는 둔산 신시가지가 두터운 중산층을 이루고 있는 점도 대전의 예술문화를 꽃피우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대전〓권기태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