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전거 도둑'을 떠올리게 하는 김치치즈바게트[사진=전영한기자]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습한 공기가 우리 모두의 땀줄기와 섞여 흘러 강물을 이룬다. 찬 음식으로 몸을 식히려 해도 잠시뿐, 1초도 못 가서 사라지는 냉기는 오히려 더위만 부각시킬 뿐이다. ‘피서(避暑)’라는 목적 아래 떠나는 바캉스도 사실 요즘 같은 피크시즌엔 더위 피하려다 찜통에 갇히게 될 확률이 높다. 차라리 선풍기 바람에 한평짜리 돗자리라도 TV 앞에 깔고 앉아 지나간 영화나 한 편 보면 어떨까? 오늘은 아련한 흑백 영화 속의 음식들을 돌아본다.
●자전거 도둑
필자가 편애하는 영화의 종류는 2차대전 후에 만들어진 이탈리아의 흑백 영화들이다. 내 이상형이 되어 준 영화 속의 많은 여자들은 전후의 빡빡한 생활 중에도 허리가 잘록한 개더 스커트에 틀어올린 곱슬머리와 5㎝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억척스레 살아간다. 힘든 삶이지만 물 한잔 마실 때면 웃을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영화 속 남녀는 소박한 사랑을 나눈다.
20세기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인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1901∼1974)은 ‘자전거 도둑’이란 영화에서 전후의 흉흉한 민심과 그 안에 살아가는 ‘보통사람’의 모습을 통해 궁지에 몰린 인간은 누구나 ‘도둑’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원제는 ‘자전거 도둑들’). 영화의 배경인 40년대 이탈리아에 부부와 어린 아들로 이루어진 빈곤한 가정이 등장한다. 베갯잇을 벗겨 팔아야 그날 식량을 살 수 있는 이들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은 자전거인데, 그만 부자가 한눈 파는 사이에 자전거를 도둑맞고 만다.
어린 아들의 손을 쥐고 온 시내를 뒤지며 자전거를 찾는 부자의 처량한 모습이 극의 중반까지 비춰지고, 맥이 빠질대로 빠진 부자는 조그만 피자리아(pizzaria·조각 피자나 잔술을 파는 곳)에 멈춘다. 모든 이가 커다란 피자를 앞에 두고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버지가 주문한 빵 두 조각과 하우스 와인(아마도 물보다 값이 쌀) 한병이 나온다. 큼직하게 썬 바게트 위에 녹아 있는 모차렐라 치즈를 본 어린 아들은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고 아버지도 빵을 집으며 “지금만큼은 다른 걱정 잊고 맛있게 먹자”고 한다. 비록 그 말이 끝나자마자 또 자전거 생각에 잠기지만.
도톰히 썬 바게트 빵 위에 뜨겁게 볶은 김치, 시금치 그리고 토마토를 올리고 모차렐라 치즈를 녹여 우리식으로 퓨전한 빵 한조각을 곁들이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결말에 다다른다.
지쳐 떨어진 아버지는 이판사판 자신 역시 자전거를 훔쳐 타기에 이른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아주 충동적으로 말이다. 도둑으로 몰려서 내팽개져친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 부자의 뒷모습이 찡하게 작아지며 영화가 끝난다.
●라 돌체 비타:달콤한 인생
시각적 이미지의 표현이 빛의 명암만으로 제한되는 흑백 영화란 음식을 보여 주기에는 힘든 수단이다. 음식이란 것이 홍고추는 붉게, 대파는 파랗게 보여야 옳은데, 흑백 영화에는 검거나 흰 영상 딱 두가지 뿐이니 말이다. 따라서 흑백 영화 속에서는 12첩 반상의 다양함보다는 설렁탕 한 그릇의 상징성이 더 빛을 발하고 자세한 메뉴를 보이는 대신, 극의 흐름을 돕는 다소 철학적인 의미의 음식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데시카 감독보다 딱 20년 뒤에 태어나고 딱 20년을 더 산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1920∼ 1994)의 명작 ‘라 돌체 비타’는 ‘자전거 도둑’의 20년 후 이탈리아 모습을 담은 60년대 영화다. 제목처럼 달콤하게 치장한 여인들과 화려한 스포츠카의 남자들로 불야성을 이루는 사교계의 밤이 화면 위에 펼쳐진다.
이 영화 속 식탁 위에 오르는 음식은 샴페인과 에스프레소 커피(진하게 우린 이탈리아식 커피 원액) 단 두가지 뿐. 황금 빛깔과 그 위를 덮어 넘치는 뽀얀 거품, 그리고 별처럼 솟구치는 기포의 샴페인이 보여주는 인생은 화려한 달콤함 그 자체로 영화의 제목과도 완벽히 들어맞는다. 연일 계속되는 파티마다 성장한 남녀가 모여들고, 장면마다 샴페인이 넘쳐 흐른다. 경제적 이유든, 인간 관계든 파티장을 벗어난 모든 이들의 삶은 사실 그리 달콤하지 않지만, 일단 파티만 시작되면 그들이 나누는 것은 공허한 웃음과 샴페인뿐이다.
유머와 환상이 가득한 화면 속에 스며 있는 펠리니 감독의 현실을 꿰뚫는 주제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장면마다 여과 없이 튀어 나온다. 빈곤한 가계, 지겨운 관계들을 마주해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면 인물들은 더 이상 샴페인을 마시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진하디 진한 커피,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샴페인의 기포와 거품이 다 빠지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 마시는 쓴 커피 한잔의 맛은 잔인하게 사실적으로 모두의 잠과 꿈을 깨운다.
오늘처럼 무더운 날엔 펠리니의 배우가 된 듯 진한 커피로 만든 젤리 한 스푼을 즐겨 보자. 짙게 우려낸 커피에 오렌지 껍질을 흩뿌리면 향긋쌉쌀 향이 더하고, 여기에 불려둔 젤라틴을 섞어 차게 굳히면 되는데, 버터나 크림이 듬뿍 얹힌 화려한 케이크보다 거칠고 차가운 맛이 오히려 신선할 것이다. 언제나, 달콤한 것만이 최상의 맛은 아니듯이 말이다.
만가지 색상을 디지털로 입힐 수 있는 21세기. 우리의 감각은 너무 단맛에, 너무 다양한 색감에 물들어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흑백 영화처럼 순박하고 단조로워서 빛이 나는 사랑이란 이젠 한낱 꿈일 뿐. 사랑하고 싶다면 부드럽게 내미는 신용카드 한장으로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만 하는 쓸쓸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박재은 파티플래너·요리연구가
◆김치 치즈 바게트
●재료
15㎝길이의 바게트 2개, 김치 100g, 시금치 1/2단, 토마토 2개, 양파1/3개, 다진 마늘 1작은술, 식용유(또는 올리브유), 소금, 후추, 모차렐라 치즈 1컵
●만드는 방법
1. 바게트는 횡으로 반 갈라서 총 4조각을 만들고 오븐은 180도로 예열한다.
2. 팬에 기름을 달구어 잘게 다진 양파, 마늘, 김치를 볶는다.
3. 또 기름을 달구어 시금치와 토마토를 볶으며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2와 합쳐서 볶는다.
4. 1의 빵 단면에 3을 적당량씩 올리고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얹어서 7분간 굽는다.
※오븐 토스터에 구워도 좋다. 오븐이 없으면 빵의 단면을 미리 팬에 구운 후 내용물과 치즈를 올려서 팬을 이용해 약한 불에 녹인다.
◆커피 젤리
●재료
짙게 탄 커피 2컵, 오렌지껍질 30g, 설탕 2큰술, 젤라틴 3장
●만드는 방법
1. 젤라틴을 찬물에 담가서 불려둔다.
2. 오렌지껍질은 길게 자른다. 그 중 20g은 물에 데쳐서 설탕 2큰술에 조려둔다.
3. 커피를 짙게 타고(에스프레소 커피면 금상첨화) 뜨거울 때 나머지 10g의 오렌지 껍질을 넣고 향을 낸 뒤 건져낸다.
4. 1의 젤라틴을 물에서 건져 꼭 짠 후 3의 커피에 섞어 녹인다.
5. 틀에 4를 붓고 얼음 위나 냉장고에서 몇시간 굳힌 후 컵에 담고 2로 장식한다.
※젤라틴을 굳히는 틀로는 은박으로 된 컵케이크를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