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DJ 상반된 평가 - 연합
《최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검정을 통과해 내년부터 고등학교에서 사용될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4종이 형평성 논란을 빚고 있다. 이들 교과서에서 현대사의 기술 시점을 김대중(金大中) 정부까지 포함시키면서 현 정권의 치적을 많이 소개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 형평성 논란을 빚고 있는 고교 검정 교과서 파동에 대한 역사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의 견해, 외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역사 서술 시점 등을 알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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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형평성 논란은 한마디로 자신들의 업적과시에 조급함을 느낀 현 정부의 ‘치적 과시욕’과 해당 출판사들의 ‘상업적 욕심’,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이나 검증 및 토론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일천한 역사성’ 등이 두루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역사학자들은 특히 역사교육의 나침반 역할을 할 교과서가 ‘당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시대 흐름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것일 뿐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거나 이를 미화하기 위한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의 교과서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국사에서 분리해 7차 교육과정에서 처음 도입된 심화선택과목. 따라서 근현대사의 개념 규정이나 시대 구분에 대한 충분한 토론이 이뤄져야 했음에도 이에 대한 의견 수렴이 없었던 것이 우선 문제로 지적된다. 현대사 교과서의 역사 기술 시점 문제와 관련해 어느 시기까지 다뤄야 하는가를 놓고 역사학계의 의견도 엇갈리고 있기 때문.
하나의 사건이나 정권이 역사적 기술의 대상이 되자면 일정 기간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특히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인식을 형성하는 역사교과서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번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만든 출판사나 집필자들은 모두 “교과서 서술에 정부쪽의 ‘특별한 주문’이나 ‘요구사항’은 없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교과서 내용의 선정과 관련해 교육인적자원부가 제시한 ‘역사학계에서 정설화된 것을 중심으로 선정’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하거나 이념적인 문제의 소지를 지니고 있는 내용은 피하면서 근현대사의 흐름을 객관적이고 주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선정한다’ 등의 지침은 외견상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 출판인은 “기본적으로 교과서는 검정을 통과해야 하므로 출판사나 저자들이 정부, 특히 현재 진행형인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쓰기가 곤란하다”고 털어놨다.
지금까지 역사교과서에서 현대사에 관한 기술은 당시 정권에 의해 영향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제주도 4·3사건,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광주민주항쟁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은 교과서가 바뀔 때마다 다르게 평가돼 왔다. 20∼50년 전 사건들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 규명과 평가가 아직 진행중인 상황에서 현 정권의 ‘자화자찬식 업적’이나 ‘일방적 남북관계’ 등을 교과서에 서술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연세대 김도형 교수(한국사)는 “제5공화국 시절 국정교과서에도 박정희 정권은 비판하고 전두환 정권만 미화했었다”며 “검인정 교과서라 해도 교육부 등의 서술지침이 있기 때문에 납본 후 수개월간 심사하면서 현 정권의 정당성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역사교과서의 집필과 심사 과정에서 현 정권의 직간접적 압력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원로 사학자인 서강대 차하순 명예교수(서양사)는 “예전에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면서 교육부의 서술 지침과 충돌해 결국은 집필했던 교과서가 채택되지 못한 적이 있다”며 “모든 역사 서술은 전적으로 역사가에게 맡겨야 하고 그 성과에 대한 평가 역시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은 ‘객관성 담보’를 위해 일정 기간 이전까지로 시대를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려대 정태헌 교수(한국사)는 “아무래도 현실의 집권 세력과 바로 맞닿아 있는 부분을 역사로 기술하는 데는 역사가도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현재 진행중인 일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며 “대체적인 가닥이 잡혀 있는 1980년대까지만 서술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현 정권에 관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학계에서는 특히 현 정권에 관해 기술할 경우 정권 홍보용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우려한다. 물론 ‘역사가는 현재를 포함한 모든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에서도 현재의 사실까지 다루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학회 이주영 회장(건국대 교수)은 “어느 경우든 중요한 문제는 현재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며 “특히 객관적이고 다양한 가치관을 접해야 할 청소년들에게 ‘의도된 역사’를 정설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교과서 검정 절차
내년부터 고교 2, 3학년생이 배우게 되는 심화선택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내용 가운데 김영삼(金泳三) 정부와 김대중(金大中) 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두산출판사, 금성출판사, 대한출판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근현대사 교과서 4종은 김영삼 정부의 경우 공과를 모두 다뤘지만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치적의 비중이 많았다.
특히 임기가 끝나지 않은 현 정부를 역사적으로 평가해 기술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란에서는 너무 성급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국가가 만드는 국정교과서를 줄여 나가는 대신 민간 출판사에서 편찬한 다양한 교과서가 학교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검정교과서 제도를 확대해 왔다.
현재 검증을 통과하면 교과서로 채택할 수 있는 교과용 도서 검정 대상 과목은 모두 187개. 중학교가 65개 과목이고, 고교는 일반 선택 과목 27개와 심화 선택 과목 66개 등 122개가 있다.
교과서 검정은 교육인적자원부가 교육과정에 따라 검정 공고와 연구검정위원을 위촉하고 심사 관련 실무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맡고 있다.
통상 출판사가 제출한 심사본을 놓고 교과별 전문가인 중고교 교사와 대학 교수로 구성된 검정위원회가 심사한다. 이번 근현대사 교과서 심사는 교사 5명, 교수 5명 등 10명이 담당했으나 연구검정위원이 누구인지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심사 과정에서 각종 청탁 등 비리의 소지를 없애고 심사위원들이 소신 있게 심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국내 학계는 바닥이 좁아 연구검정위원으로 선정된 학자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학자가 교과서 기술 문제를 놓고 잡음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
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는 “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에도 이에 관한 예외 조항이 있다”며 “몇 년 전 법원이 명단 제출을 요구했으나 회의록 제출로 대신할 정도로 명단은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연구검정위원들은 출판사가 제출한 심사본에 대해 1, 2차 심사와 수정 보완을 거쳐 검정 합격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이 최종본은 아니다.
26단계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교육부에 제출하면 교육부 편수관들이 내용을 분석하고 문제가 있거나 부족한 부분은 직권으로 수정 보완하도록 출판사에 요구할 수 있다. 이를 거부하면 검정 합격이 취소될 수도 있다.
이인철기자 inchul@donga.com
▼선진국 교과서는…
정권 교체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많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우,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현 정권의 공과를 다루거나 가치평가를 개입시키는 일은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다.
2차대전 뒤 서독 초대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기독교민주당(CDU) 정권을 이끌고 서독을 확고한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업적평가가 교과서에 실린 시기는 사회민주당(SDP)정권의 빌리 브란트 총리 재임시절에 이르러서였다.
브란트 총리 역시 ‘동방정책(Ostpolitik)’을 통해 동유럽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통일의 초석을 쌓는 업적을 남겼으나 이 업적 또한 정권이 다시 기독민주당으로 교체된 후에야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 가치평가가 들어가는 내용은, 직전 정권까지에 한해, 긍정적인 부분만 가능하다’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는 것.
프랑스에서도 좌우파를 오가는 정권교체가 잦았지만 현 정권 혹은 직전 정권의 공과와 관련된 부분은 역사교과서에 싣지 않고 있다. 대신 최근세사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이민(移民) 문제 또는 유로화 통용 등 정권과의 직접 관련성이 적고, 사회적 영향은 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선진민주국가 중 최근 사건의 교과서 수록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미국. 미국 학교들이 가장 많이 채택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 ‘The American Nation’은 2002년판에서 테러에 대해 두 단락을 할애했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슬람원리주의에 대한 내용도 실을 것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테러에 대한 정권차원의 대응상황은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
이화여대 조지형 교수(미국사)는 “오랫동안 미국도 동시대의 사건을 교과서에 싣지 않았지만, 진보적 역사관을 가진 소장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최신 사건까지 현대사 교과서에서 싣고 있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이 경우에 있어서도 역사적 사실을 사건 소개 차원에서 다루는 것일 뿐, 정권의 가치평가와 연관된 언급이 실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감대는 확고히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