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31일 49세의 나이로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한 일본의 대표적 미술사학자 지노 가오리(千野香織·사진). 일본 도쿄(東京) 가쿠슈인(學習院)대 문학부 교수였던 그의 대학 연구실 출입문엔 늘 한국의 전통 매듭이 걸려 있었다. 그만큼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개월. 그가 남긴 인연의 끈이 한국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의 유족과 동료 교수들이 최근 고인의 소장 도서 7300여권을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중앙박물관은 31일 이 책들을 공개했다. 이번에 기증된 장서 7300여권은 고인이 소장했던 책 전부. 일본의 미술 역사 문학을 비롯해 중국미술 불교미술 관련 서적들이다.
장서 기증의 아이디어를 낸 이들은 동료 교수들이었다. 올해 초 고인에 대한 추모 사업을 구상하던 동료들은 고인이 한일 문화 교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점을 기려 그의 책을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노 교수의 오빠 나카무라 고이치(中村光一)도 흔쾌히 승낙했다.
지노 가오리 교수의 기증 도서 중 하나인 '명보 일본의 미술'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고인과 한국의 인연은 각별했다. 고인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경기 광주시에 있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나눔의 집’도 자주 방문했다. 중앙박물관측은 “고인의 이러한 인연이 사후에도 도서 기증으로 이어진 것 같다”며 “고인의 오빠가 ‘한국으로 건너간 책들과 함께 지노의 영혼이 한국에서 되살아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일본 중세회화사의 권위자이며 일본 미술사 연구에 젠더(성·性) 개념을 도입해 학계의 주목을 받은 인물로 특히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진보 학자로 평가받았다. 교토(京都)대 미학미술사학과를 나와 도쿄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도쿄국립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1989년부터 가쿠슈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에서 객원 연구원을 지내기도 했다.
중앙박물관은 2005년 개관하는 서울 용산의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지노문고(千野文庫)’(가칭)를 만들어 기증 도서를 관리할 예정이다. 박물관측은 “새 용산박물관의 일본실 전시와 일본 미술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박물관은 고인과 고인의 오빠, 도서 기증을 위해 노력한 고바야시 다다시(小林忠) 가쿠슈인대 교수에게 정부 차원의 포상을 추천할 계획이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