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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8월의 저편 87…밀양강 (3)

입력 | 2002-08-01 18:41:00


1925년 봄. 남동생이 태어난 다음 날, 우철은 소학교에 등교했다. 수신시간에 교육칙어를 봉독하면서 자기 목소리가 아픔처럼 울리는 것을 느낀다. 쉬는 시간, 아리랑을 부르고 싶은데, 창가 시간에 배운 군가를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린다. 친구 우홍이가 우철에게 항일 투쟁가 김원봉의 기사를 보여주면서, 언젠가 의열단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나를 만나기 10년 전에 태어난 남자아이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를 만나고 난 후에 남자아이가 태어나다니-, 산신 할매가 그 여자를 편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산신 할매를 적으로 돌린 셈이다.

그 여자의 얼굴은 본 적이 있다. 처음으로 그 사람 품에 안긴 다음 날 아침, 가게로 고무신을 사러 갔다. 얼만가예? 사십 오전입니다. 잔돈을 받을 때 손가락이 서로 부딪쳤다. 손가락으로 파고든 누에 같은 금반지를 보는 순간, 심장을 맨 손으로 움켜잡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양이 여자가 서 있는 장소를 그늘에서 양지로 바꾸었는데도 여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도읍에서 흘러온 강의 왕자는 도처의 강가에서 여자를 품지 않았을까? 내가 그 사람에 끌린 까닭은 그 사람이 밀양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흘러와, 어디론가 흘러갈 남자였기에. 그 사람은 한 자리에 머물 수 없다. 그 사람이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남자아이를 낳고 싶다. 그 사람을 쏙 빼닮은 남자아이를 낳아, 이 강가에서 키우고 싶다. 여자는 종남산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신님께 비나이다 그 사람 아를 갖게 해 주시라예, 모쪼록 사내아를 갖게 해주시라예.

여자는 종남산이 진달래로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진달래뿐이 아니다. 강가에는 온통 민들레와 냉이, 제비꽃이 활짝 피어 있다. 나도 활짝 피어 있다. 그 사람이 야속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처음 그 남자 품에 안길 때부터 미움보다는 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면서 밀회를 거듭하고, 만날 때마다 모질게 미워하고, 모질게 원했다.

여자가 잠들어도 두려움은 잠들지 않았다. 두려움은 여자를 흔들어 깨워 강가를 거닐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미움을 강에 묻을 수도, 바램을 강물에 흘려보낼 수도 없었다. 어젯밤에는 배다리 쪽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밤은 알 수 없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금줄 아래를 걸어 들어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