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금발 머리와 ‘하늘이 내린’ 풍만한 몸매, 게슴츠레한 눈빛, 도발적인 걸음걸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목소리….
할리우드에는 수많은 섹시 스타들이 등장했다 사라졌지만, 마릴린 먼로는 시대를 뛰어넘는 ‘섹스 심벌’의 대명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5일로 꼭 40년.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의 사용료만 연간 200만달러(24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다’.
돔 페리뇽을 즐겨 마시고 잠옷 대신 ‘샤넬5’ 향수만 ‘입고’ 잔다는 사실까지 그녀에 대한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이 알려졌지만, 정작 전화기를 쥔 채 침대에서 벌거벗고 숨을 거둔 죽음의 진실만큼은 아직도 베일에 쌓인 수수께끼.
공식 사인은 ‘약물과다 복용’.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먼로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삼각관계의 염문을 뿌렸던 것과 관련돼 살해됐다는 ‘음모론’을 믿고 있다.
먼로는 1926년 6월 1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이름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복잡한 남자관계로 누가 아버지였는지 몰랐던 먼로의 어머니는 가장 마지막에 사귄 남자의 성을 따 ‘노마 진 베이커’로 출생 신고를 했다.
이렇듯 부정(父情)에 목말랐던 어린 시절 때문일까. 훗날 마릴린 먼로는 나이가 많거나 권위를 가진 남성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뿌렸다.
아홉 살 때 고아원에 보내진 그녀는 16세 때 ‘고아원에 돌아가지 않기 위해’ 21세의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하지만 4년후 이혼한다.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의 시작이었다.
모델활동을 하던 그녀는 21세때 ‘쇼킹 미스 필그램’으로 영화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27세때 ‘나이애가라’로 스타덤에 오른 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와 ‘백만 장자와 결혼하는 법’이 잇따라 히트하면서 가장 사랑받는 할리우드 여배우가 됐다.
1954년 마릴린 먼로는 스타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지만 9개월만에 파경을 맞았다. 세 번의 결혼 중 가장 짧았던 결혼이었지만, 먼로에 대한 디마지오의 사랑만큼은 가장 오래 지속됐다. 디마지오는 먼로가 숨진 후 20년동안 매일 아침 꽃다발을 무덤에 보낸 일화로 유명하다. 세 번째 남편은 극작가 아서 밀러. 5년만에 이혼했다. 케네디 형제와 염문을 뿌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 생일 때 요염한 목소리로 그녀가 대통령을 위해 부른 ‘해피 버스 데이 투 유’는 가장 섹시한 생일 축하곡이 됐다. 이날 입었던 먼로의 드레스에는 ‘해피 버스데이’라는 애칭이 붙었으며 199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15만달러(약 13억원)에 팔렸다.
생전 30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먼로는 ‘버스정류장’에서 가장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7년만의 외출’에서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손으로 내리누르는 먼로의 모습은 영화 사상 가장 매력적인 장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먼로는 한국에 대해서도 각별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1954년 2월, 당시 디마지오와 신혼 여행중이었던 먼로는 미군 위문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엄동설한에도 몸에 달라붙는 얇은 드레스 차림의 그녀를 보고 병사들은 열광했고, 훗날 먼로는 “내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한국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먼로의 공식 인터넷 사이트(www.marilynmonroe.com)에 올라있는 프로필을 보면 ‘개인적인 추억’란에 ‘Korea’라고 적혀있다.
살아있다면 일흔 여섯 살이 됐을 마릴린 먼로. 생전 그녀는 “나는 늙어서 성형수술을 하지 않겠다. 세월이 만들어낼 나의 얼굴에 당당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1962년 8월 5일 서른 여섯의 나이로 생을 끝내면서 영원히 팬들의 뇌리속에는 섹시한 금발 미녀의 모습으로만 남아있게 됐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