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경제 포커스]한국기업 수익-장래성 좋은데 증시 저평가 왜?

입력 | 2002-08-05 17:38:00


똑같은 품질인데도 단지 한국에서 만든 상품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낮게 쳐 준다면?

원통한 일이지만 이는 한국 증시의 오랜 숙명과도 같은 현실이다.

한국 증시의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현상. 똑같은 이익을 내고 장래성도 다른 나라 기업에 못지않은데 출신국이 ‘코리아’라는 이유로 주가가 낮게 평가되는 현상을 말한다.

월드컵 이후 기업들은 앞다퉈 ‘코리아 브랜드’를 내세우고 있다. 적어도 실물경제에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아니라 ‘코리아 프리미엄(Korea Premium)’이 적용된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한국 주식은 여전히 싼값에 거래된다. 도대체 ‘코리아’라는 이름이 왜 증시에서는 기업의 가치를 깎아먹는 악재로 작용하는 것일까.


▽싸구려(?) 한국 주식〓각국의 주가수익비율(PER)을 비교하면 한국 주식이 얼마나 싼지 쉽게 알 수 있다. PER는 주가와 기업이 창출한 이익을 비교한 수치로 낮을수록 주가가 기업의 이익에 비해 저평가됐음을 의미한다.

금융 증권 데이터서비스업체 데이터스트림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현재 한국 증시의 평균 PER는 13.6. 이는 미국(21.6) 일본(36.8) 영국(15.3) 등 선진국은 물론 중국(33.0) 인도네시아(15.1) 필리핀(14.6) 말레이시아(17.8) 등 아시아 증시보다도 낮은 수치다. 똑같은 이익을 내더라도 한국 기업의 주가는 미국 기업의 절반, 일본과 중국 기업의 3분의 1 수준에 머문다는 뜻이다. 개별 업종을 살펴봐도 사정은 마찬가지. 한국 경제의 간판 업종인 전기전자업종(삼성전자 LG전자 등 포함)의 업종 평균 PER는 7.0이다. 이는 선진국은 고사하고 아시아 평균 전기전자업종 PER(47.2)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치. 지난해 10월 이후 한국 증시가 세계 증시에 비해 비교적 큰 폭의 오름세를 보였는데도 이처럼 PER가 낮다는 것은 한국 증시의 저평가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문제는 증시 내부에 있다〓그동안 전문가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 △높은 국가위험도 △낮은 국가경쟁력 △높은 부패지수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 등을 꼽았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은 2000년 이후 사실상 해소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 높은 국가위험도는 잇따른 국가신용등급 상향 조정으로 해결됐고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도 적극적인 구조조정으로 많이 해소됐다. 외환위기 이후 한때 세계 41위까지 처졌던 국가경쟁력도 지난해 28위권(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발표)으로 회복된 상태.

메리츠증권 고유선 선임연구원은 “네 가지 원인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해소됐으며 앞으로도 한국 증시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 증시 저평가의 원인을 증시 밖에서가 아니라 증시 안에서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저변 확대가 최우선 과제〓최근 증권가에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더 사줘야 해결된다. 따라서 외국인에게 한국 경제 및 증시의 펀더멘털이 괜찮음을 적극 알려야 한다”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증시의 외국인 의존도는 지금도 이미 높은 편. 외국인투자자가 삼성전자 지분을 10%만 줄여도 증시 전체가 반도막 나는 게 한국 증시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에게 더욱 의지하려는 것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

동부증권 장영수 기업분석팀장은 “증시 저평가 극복의 핵심은 한국 증시의 저변 확대에 있다”며 “미국 증시에 휘둘리는 외국인투자자보다 기업의 가치를 보고 투자하는 ‘질 좋은 한국 장기투자자’의 돈이 더 많이 증시에 들어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한국의 상당수 기업은 배당이나 주주의 권익 보호에 별 관심이 없다. 기업이 이익을 주주에게 돌려주지 않는데 건전한 투자자들이 증시에 적극 참여할 리가 없다.”

신영증권 리서치센터 장득수 부장의 말이다. 주주를 무시해온 풍토가 증시 저변 확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설명.

꾸준한 배당 등 주주 중시 풍토가 정착된 미국 증시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코카콜라 등 우량주 보유자 가운데 상당수는 주식을 노후 생계수단으로 여기는 장기투자자다.

기업들은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으로 이익을 투자자와 공유함으로써 더 많은 투자자를 증시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투자 풍토가 획일화된 것도 문제다. 한국 증시의 대부분 펀드는 대형주 위주로 짜여졌다. 삼성전자 국민은행 등 각 펀드매니저가 펀드에 편입한 종목 내용이 마치 서로 짜고 하는 것처럼 똑같다. 저평가된 중소형주에는 펀드매니저들의 투자자금이 제대로 돌지 않는다.

펀드매니저들이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투자하기보다는 ‘남들과 비슷하게 투자하면 봉변은 안 당한다’는 생각으로 투자에 나서기 때문.

새턴투자자문 박정구 부사장은 “대형주 위주의 획일화된 투자문화가 실력 있는 수많은 중소기업의 주가를 실제 가치에 못 미치게 만들었다”며 “다양한 펀드, 다양한 투자문화가 발전해야 이런 저평가 현상이 해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