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신문이 우리와 크게 다른 것 중의 하나는 부고란이다. 자투리 지면에 단순히 빈소를 안내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고정 지면을 갖고 고인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어디에서 언제 태어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알려준다. 따라서 부고 기사만 읽어도 훌륭한 인생 교과서가 될 정도다. 성공한 인생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애환에 가득 찬 생애를 애잔하게 전해주기도 한다.
▼故人 이름으로 직접 기부▼
우리보다 지면이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삶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 개개인을 중시하는 서구사회의 경우 한 인간의 삶을 조명한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현주소를 다루는 일만큼이나 값지고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가 나름대로 값지고 보람된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는 지독한 개인주의와 사회적 낙관주의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바로 이런 보도 관행을 낳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부고 기사에서 정작 주목하게 되는 것은 기사의 말미에 소개되는 부조금이나 조화에 대한 안내문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조금이나 조화를 내고자 한다면 빈소가 아니라 자선단체나 종교기관 또는 고인이 관련된 사회운동단체 등에 고인의 이름으로 직접 내 달라고 하면서 특정기관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처럼 공직자는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고 하거나 내가 그동안 내 놓은 부조금이 얼만데 어떻게 이를 되돌려 받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부조문화는 사실 고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남겨진 자식이나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한 인간이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까지 제 자식, 제 가족만을 생각하도록 만든 데서야 어디 고인에 대한 대접이 되겠는가. 진정으로 고인을 위한다면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만이라도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뭔가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와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남은 자들의 도리가 아닐까. 가장 영예롭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고인을 돕는 일은 남은 이들의 마지막 책무라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의 경우 이런 식으로 해서 사회 전체가 1년 동안 자선기관에 자발적으로 내놓는 금액이 국민총생산의 12%에 이른다. 바로 이 자발적 사회부조의 힘이 미국 사회 특유의 개인주의와 적자생존의 원리에 기초한 시장질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패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결과 미국식 자유주의체제를 유지시켜 주는 근간이 되어 있다. ‘가난은 임금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국가가 모든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국민을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는 행정관료나 정치인이 오로지 공익과 사회를 위해 일할 것이라고 믿는 이는 이제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이런 대리인을 시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국민 스스로가 자율과 자치의 정신에 따라 생활주변의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고 적실성이 있으며 적극적 문제 해결 전략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구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온 지 오래다.
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의 계층간 격차가 심화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런 사회 부조의 필요성을 보다 더 절감케 한다. 여기에 더해 우리 사회에는 공적인 사회안전망 시설이 몹시 취약한 실정이다. 사회단체나 자선기관의 활동이 시급히 강화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매우 심각한 사회적 균열과 갈등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민간서 사회운동 앞장설 때▼
이는 국제사회에도 같다. 월드컵 개최를 통해 우리에 대한 지구촌의 평가가 상향조정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분담해야 할 책무와 기댓값도 함께 커져 있다. 이를 모두 정부가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일에 따라서는 정부보다는 민간이 나설 때 더욱 효과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때마침 전경련에서는 월급의 1%를 봉사단체에 자동이체하는 ‘퍼센트 클럽’ 운동을 편다는 소식도 있다. 우리같이 관혼상제에 대한 문화적 집착이 큰 사회에서는 부조금을 자선단체나 사회운동단체에 직접 내도록 하는 사회운동을 펼치는 것도 공적 부조를 확대하고 사회적 연대감을 확장하는 효과적 대안이 아닐까. 새로운 부조문화의 확산을 기대해 본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미국 버클리대 풀브라이트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