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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건설사 CEO들 “住테크 성적은 별로…”

입력 | 2002-08-07 17:37:00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에서 내려 입시학원가를 지나 오르막길에 들어선 지 15분. 언덕이 끝났다고 느낄 즈음에 담 위로 유실수(有實樹)들이 머리를 내민 2층 양옥이 보인다. 20년은 족히 됨직한 낡은 집. 롯데건설 임승남(林勝男·64) 사장의 자택이다. “왜 이런 곳에서 사시죠?” 프리미엄이 수천만원씩 하는 아파트를 지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택시도 오기를 꺼리는 언덕배기 단독주택을 고집하는 게 의아했다.

이 집은 임 사장이 1978년 직접 지었다. 노부모를 모시기 위해 공기 좋고 정원을 꾸밀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집값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사 놓은 땅을 팔아 충당했다. 임 사장이 말하듯 재테크로 보면 ‘빵점’이다. 방배동 땅값은 그때보다 10배 이상 뛰었다.

“저도 ‘집장사’를 하며 투자가치를 강조하곤 하지만 집이라는 게 돈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형(無形)의 효용이 있어요. 집으로 목돈을 마련할 만큼 신경쓸 시간도 없었고요.”

최근 서울 강남 아파트 값이 한달 새 1억원까지 올랐다. 아파트는 샐러리맨들이 부(富)를 축적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부상했다.

그렇다면 샐러리맨들의 꿈인 최고경영자(CEO)들은 집으로 돈을 벌고 있을까. 특히 한 해 수천 채씩 집을 지어 파는 건설업체 CEO들의 ‘주(住)테크’ 실력은 어떨까.

▽회사가 가까워야〓회사 근처에 집이 있는 CEO가 많다. 출퇴근에 들어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기 때문.

공사를 따내기 위해 발주처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본이다. 공사현장 인근 주민들의 민원도 사장이 직접 나서 해결할 때가 많다. 사내(社內)는 물론 외부 행사에도 참가해야 한다. 수주 위주의 건설업 특성상 사장의 ‘안면’이 필요할 때가 많기 때문에 몸이 2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강문창(姜文昌·59) 두산건설 사장도 이런 이유 때문에 회사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인 서울 강남구 논현동 동현아파트에 살고 있다. 87년부터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강 사장은 그동안 몇 차례 집을 옮길 생각도 했다. 하지만 회사에 일이 생기면 늦은 밤에도 바로 사무실로 나갈 수 있는 편리함 때문에 이내 포기했다. 이상대(李相大·55)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도 비슷한 이유로 회사가 있는 경기 성남시 분당 신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심현영(沈鉉榮·63) 현대건설 사장 역시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경기 용인시 기흥읍에 있는 빌라를 두고 서울 서초구 잠원동 한신아파트에 전셋집을 얻었다.

▽친(親)환경 주거지 선호〓건설업체 사장들은 녹지가 많거나 경치가 좋은 지역에도 많이 산다. 삭막한 건설 현장을 누비고 거친 민원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지역을 상대적으로 선호한다.

이방주(李邦柱·59) 현대산업개발 사장과 남상국(南相國·57) 대우건설 사장이 대표적인 경우. 한강이 바라다보이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 사장은 집에만 들어오면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남 사장도 시끄러운 현장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주택가를 15년째 떠나지 못하고 있다.

▽주(住)테크 성적표〓집으로 돈 번 CEO는 현대건설 심 사장 정도다. 70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장만한 13평형 아파트가 최초의 ‘내 집’이었다. 이후 강남과 경기도로 옮겨다니며 평수를 늘린 끝에 지금은 빌라와 아파트를 포함해 3채(아들 명의 아파트 1채 제외)를 갖고 있다. 나머지 CEO들은 대부분 낙제점이다.

금호건설 신훈(申勳·57) 사장은 싼값에 집을 샀다고 생각했지만 평형과 입지를 잘못 골랐다. 신 사장은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초 강서구 등촌동 55평형 아파트를 4억원에 매입했다. 지금 시세는 4억5000만원 선. 겨우 금융비용 정도를 건졌다. 이유는 등촌동이 20∼30평형대 수요가 주로 밀집된 곳이기 때문. 대형 평형은 가격이 오르기 어렵다. 그는 이보다 더 ‘아픈’ 기억도 갖고 있다. 70년대 후반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버리고 강북에 있는 연립주택을 택한 것이다. 당시 은마아파트는 미분양 상태였다.

한화건설 김현중(金玄中·52) 사장은 ‘전강후약(前强後弱)’의 전형. 직장생활 5년 차였던 80년 전세를 끼고 송파구 잠실주공아파트 13평형을 샀다. 이후 당시로는 ‘첨단기법’이었던 재개발 지분투자를 통해 지금 살고 있는 송파구 오금동 대림아파트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재건축이 시작되는 잠실주공아파트에 비해 대림아파트의 가격상승세는 더디기만 했다.

▽보상은 다른 곳에서〓CEO들은 한결같이 “집으로 돈벌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털어놓는다. 시간도 없고 요령도 없다는 것.

대신 주택투자에서 얻지 못한 수익을 다른 곳에서 보상받으라고 조언한다.

“CEO가 된 건 내 집을 불리는 데 투입하는 열정을 업무에 쏟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지요.”(롯데건설 임 사장)

“여윳돈이 있다면 강남 아파트를 잡겠다고 몸부림치기보다 장기투자용 부동산에 묻어두고 현실에 충실하는 게 낫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금호건설 신 사장)

교과서 같은 충고다. 그들의 지금 모습은 ‘원칙’이 통용됨을 보여준다. 일확천금을 노리기보다 ‘건강한 투자’에 관심을 쏟으라는 것이다. 이들이 강조하는 건강한 투자는 ‘재화에 대한 투자’ 못지않게 ‘업무에 대한 노력과 열정’을 포함한다.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