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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스테디셀러]´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입력 | 2002-08-09 17:30:00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전혜린 지음/368쪽 8500원 민서

“…누구나 자기의 쥐덫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쥐덫, 그리고 그 밖으로는 인류의 운명이라는 역사성, 시간성의 쥐덫이 놓여있다.…죽음을 내포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기의 내부에 파고드는 것, 내적 관조에 의해서 어떤 체념적인 긍정을 얻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이다.”

전혜린(田惠麟·1934∼1965). 그는 사는 것이 ‘신비’했고 ‘재미’있었다. 여학교에 들어가 좁아진 세계를 느끼면서 모순감과 고뇌가 싹텄고 무서운 인식욕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아버지 요구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지만 대학 3학년을 마친 1955년, 그는 자신이 원하던 문학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뮌헨대로 떠난다.

전혜린은 서른두해를 뜨겁게 살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의 글은 여전히 살아 숨쉰다. 수필집 ‘그리고…’는 그가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인생철학 노트’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랑’ 만이 인간을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소로 보았다. 가장 순수한 의식 상태에서 뜨겁게 미칠 듯이 사랑하라고 조언했다. 반면에 결혼이라는 신기루에 속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 존재의 당위성을 ‘매순간 깨어있는 의식’으로 생각했다. 그가 바라본 ‘서른 살’ 역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은 나이였다. 민서출판사 측은 “1978년 ‘그리고…’의 초판을 냈고 지금까지 50만부가 넘게 팔렸다”며 “치열하고 지독한 고뇌가 담긴 글이란 점에서 20년 넘게 독자를 흡인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 책은 감수성 예민한 10대 여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한 여고생은 민서 출판사로 “전혜린의 글에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슬픔과 감동을 느꼈다”는 장문의 글을 보내왔고, ‘그리고…’의 영향으로 독문과에 지원하는 여학생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전혜린이라는 이름도 잊혀져간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들은 지금 읽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적극적이고 도발적이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