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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보니]김근희/"김치로 일본인 마음 잡았죠"

입력 | 2002-08-13 19:08:00


1986년 9월, 일본유학을 떠나오던 날, 공항에 나온 한 후배가 내게 선물이라며 태극기와 우리나라 지도를 내밀었다. 이를 보고 친구 하나가 “야, 근희가 독립운동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아냐?”라며 핀잔하듯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이 말을 냉큼 되받았다. “무슨 소리야? 일본에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덕분에 난 일본을 배우러 떠나는 유학생이 아닌, 졸지에 일본과 싸워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사(戰士)가 되어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그야말로 일본 유학생활은 실험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국내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평소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일본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피해의식은 대단히 예민하고도 민감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의 모 대학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한국인 친구와 함께 가라오케(노래방)에 갔을 때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 가라오케에는 한국 노래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똑같은 곡을 반복해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 일본인 손님 한 명이 “일본노래도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바로 이 말이 화근이었다. 아직 일본어에 서투른 그 친구가 ‘도전’이란 말을 ‘조선’으로 잘못 알아듣고, ‘조센진’이라고 무시한다고 한바탕 싸움을 벌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도전’과 ‘조선’은 일본어 발음이 ‘조우센(ちょうせん)’으로 똑같다. ‘조센진’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과거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을 압제하던 차별 용어로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 쓰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밖에 안 나오는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도전’을 ‘조선’으로 알아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에 관한 한 한국인들은 매우 이율배반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우리 어머니에게 ‘일제’라는 것은 곧 ‘믿음’을 상징한다. 즉 ‘메이드 인 저팬’은 가장 믿을 만한 신용있는 물건이라고 맹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지난 17년 동안 일본에 살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언젠가는 이같은 일본, 일본인의 장점을 능가하는 날이 올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늘 나 스스로 최면을 걸 듯 다짐하곤 했다. 이 싸움은 서로를 살리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의 하나로, 필자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인들에게 마늘 냄새와 젓국물에 푹 전 한국산 김치, 그리고 식품류를 팔기 시작했다. 물론 초창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에는 김치 냄새만 나도 얼굴을 찡그리던 일본인들이 이제는 김치를 매일 식탁에 올리고 있다.

김포공항에서 태극기와 우리나라 지도를 선물로 주었던 후배의 기대에 부응했는지 나 자신 가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김치의 양만큼이나,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마음도 꾸준히 열리고 있다는 것을.

김근희 한국광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