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과 언어-히틀러 연설에서 민중의 악몽까지
미야타 미츠오(宮田光雄) 지음, 이와나미(岩波)서점, 2002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아무리 악명 높은 독재권력이라 할지라도, 물리적 폭력만으로 지배를 관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국민’을 지배자의 의지에 온전히 따르게 하고, 권력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어쩌면 언어 조작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인 미야타 미츠오(宮田光雄)는 오랫동안 나치의 독재 체재를 연구해 온 정치학자이다. 특히 정치권력과 말의 관계에 대한 그의 고찰은 매우 날카롭다.
저자는 먼저 히틀러의 정치 연설 수법을 분석한다. 히틀러는 엘리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성 정치세력의 배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런 무명의 선동가가 ‘독일 제3제국’의 총통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연설에 마력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대중이 열광하는지, 어떻게 하면 대중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를 직감적으로 알았다. 히틀러 연설의 특징은 대중의 정서적인 감수성에 호소하면서, 논점을 ‘우리 편/적’, ‘선/악’ 등의 간결한 이분법에 의해 ‘단순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싫증나지 않게 ‘반복’하는 것, 이와 함께 확고한 어조로 ‘단정화’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히틀러나 나치즘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언어에 찾아 볼 수 있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정치언어의 대부분은 ‘이분법적 단순화, 반복, 단정화’라는 레토릭에 의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언어에는 다른 정치언어와는 크게 다른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언어 속에 ‘의사(疑似) 종교적’ 요소가 교묘하게 파고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히틀러의 연설에는 성서의 표현을 저변에 깔고 있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독일이라는 ‘민족공동체’의 ‘신성한 사명’을 세뇌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눈으로는, 이러한 종교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의사적(疑似的)’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의 종교성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쉽게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의 패배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 당시 독일 민중에게, 히틀러가 마치 곤궁에서 자신들을 구해 줄 예언자나 구세주로 생각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시즘은 어떤 정치 체제에도 잠복할 수 있는 병원균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열광을 부채질하고, 복종을 요구하며, 공동체에 대한 희생을 역설하는 정치언어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특정한 나라를 ‘악의 축’이라 하는가 하면, 군사 행동을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문명의 사명’이라고 부르며, 걸핏하면 ‘하느님의 가호’를 내세우는 정치언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독일 제삼제국의 정치언어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파시즘기 일본에서도 이 같은 정치언어는 맹위를 떨쳤다. 일본 제국주의 정치언어도 나치 독일 이상으로 ‘의사(疑似) 종교적’ 요소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히틀러와 달리, 쇼와(昭和) 천황은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정치 연설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이연숙 히토츠바시대 교수 언어학 ys.lee@srv.cc.hit-u.ac.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