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트로겐의 시대’가 저물고 ‘안드로겐의 시대’가 떠오른다? 지난달 초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여성의 폐경기 증세 치료용으로 쓰는 에스트로겐 프로제스틴 등 ‘여성호르몬’이 유방암 심장병 뇌중풍의 위험을 높인다고 발표하자 세계적으로 ‘여성 호르몬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최근 수년간 남성호르몬(안드로겐)을 이용한 치료법이 각광받고 있다. 일부 스포츠 선수가 근력 강화를 위해 몰래 복용하곤 해서 도핑 테스트의 검사 대상이 된 남성 호르몬 제제가 근력 강화뿐만 아니라 성기능 향상, 뼈 강화, 우울감 해소 등에도 효과가 있음이 속속 알려지면서 치료용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LA타임스는 최근 ‘수많은 폐경기 여성들이 성기능 저하를 해결하기 위해 안드로겐 중의 한 종류인 테스토스테론을 인공적으로 만든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젊은 여성들은 슈퍼마켓에서 체내에서 주로 남성호르몬으로 바뀌는 디하이드로에피안드로스테논(DHEA) 보충제를 사먹고 있다’고 보도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주로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거나 뇌하수체나 부신의 이상으로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지 않는 여성이 얼굴붉힘증(홍조증)이나 성욕 저하를 해결하기 위해 테스토스테론 제제를 복용해 왔지만 최근 그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자들은 “여성에게 남성호르몬 제제가 장기적으로 어떤 작용을 할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에스트로겐으로 효과를 보지 못한 폐경기 여성의 건강을 향상시킬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남성호르몬’이 여성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까?
▽‘여성에게도 남성호르몬이 필요하다’〓흔히 남성호르몬은 남성, 여성호르몬은 여성에게서만 분비된다고 아는 사람이 많지만 남성에게도 여성호르몬, 여성에게도 남성호로몬이 분비된다.
남성에게서는 40대부터 여성 호르몬 분비가 늘며, 이 때문에 감성적으로 변해 사소한 말에도 상처받곤 한다. 간 질환자도 에스트로겐 분비가 느는데 이 때문에 가슴이 축 늘어지게 되는 것이다.
남성호르몬은 남성에게서는 고환 부신 등에서 만들어지며 여성에게서는 난소와 부신에서 분비된다. 여성에게서 에스트로겐은 폐경기에 난소가 기능을 정지하면서 급격히 분비량이 감소하는 반면 남성호르몬은 30세 무렵부터 분비량이 조금씩 준다. 여성에게서도 남성호르몬은 성욕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부족하면 성기능이 저하된다.
▽남성호로몬 제제의 확산〓미국과 영국의 의사들은 최근 폐경기 여성이 에스트로겐 요법을 받았는데도 홍조증과 질(膣) 건조증이 생겼을 때 테스토스테론 제제를 복용하면 상당수에게서 증세가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성호르몬 요법은 젊은 여성의 각종 성기능 장애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용도가 확산될 전망이다.
미국 시다스 시나이 병원의 글렌 브라운스타인 박사는 “성인 여성의 40%는 성기능 장애로 곤란을 겪고 있으며 안드로겐 보충요법이 에스트로겐 보충요법 못지 않게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의학자들은 테스토스테론 제제의 적용을 확대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테스토스테론 성분의 패치가 성기능 장애 치료에 미치는 효과를 임상시험 중이며 테스토스테론 제제가 뼈와 근육을 강화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연구 중인 것.
약이 아닌 DHEA 보충제는 90년대 한때 심장병 당뇨병 뇌중풍 다발성경화증 파킨슨병 등에 치유 효과가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의학자들의 반박에 의해 노년층의 관심은 시들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여성들은 성욕 유지, 우울증 해소를 위해 이 식품을 마구 사먹고 있다.
▽만병통치약은 아니다〓여성의 남성호르몬 제제 복용에 대해 잠재적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 소재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엘리자베스 배렛 코너 박사는 “남성호르몬 제제를 복용했을 때 단기적으로 얼굴에서 털과 여드름이 증가하고 목소리가 저음으로 변하거나 성격이 공격적으로 바뀌는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면서 “장기적으로 어떤 부작용이 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약의 남용을 경계했다. 테스토스테론 제제는 간 독성, 체액 분비 감소 등의 부작용도 있으며 DHEA 보충제도 사람마다 부작용의 편차가 다르다는 것.
DHEA의 옹호자로 ‘DHEA의 실용적 안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레이 사헤리안 박사도 “DHEA 보충제를 과다하게 섭취하면 심장병 위험이 높아지므로 하루 10㎎ 이하로 복용하고 한 달에 1, 2주는 전혀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성호르몬 제제들은 동물실험에서 성기능 장애 해소, 뼈와 근육 강화, 지방 감소 등에서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여성들이 몸매를 유지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남성의 고환에서 주로 생기는 호르몬을 앞다퉈 구입할 날이 눈앞에 닥친 것일까.
▼국내에서는…▼
국내에서는 여성에게 남성호르몬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주요 부위에 털이 나지 않는 무모증(無毛症) 환자에게 테스토스테론 연고를 바르게 하고 성욕이 현저히 저하됐을 때 테스토스테론 제제를 처방하는 것이 고작이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의 갱년기 장애에 대한 치료에는 점점 쓰임새가 늘고 있다.
남성에게서 40대 이후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감소하면 성욕 감퇴, 발기부전 등의 증세가 나타나는데 호르몬 제제를 이용하면 증세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 호르몬 제제는 알약, 주사제, 패치, 바르는 겔 등 형태가 다양하다. 알약은 간 독성, 패치는 피부 자극 등의 부작용이 있었지만 최근 부작용을 없앤 약들이 시판되고 있다.
40대 이후의 남성이 남성호르몬치료를 받는다고 모두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혈중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정상인데도 호르몬 치료를 받으면 고환이 위축되고 우울증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전립샘 질환이 있을 경우 치료를 받으면 증세가 악화된다. 따라서 남성호르몬 치료는 반드시 전문의의 진단에 따라 엄격히 실시해야 한다.
남성호르몬요법은 골절 예방, 근육 강화 등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미국 시애틀 소재 워싱턴대의 연구 결과 인지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DHEA 보충제는 몇 년째 미국 여행자들 사이에서 부모의 회춘을 위한 ‘효도 선물용’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최근 일부 인터넷 사이트와 헬스클럽에서 판매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의들은 아직까지 노화 방지, 정력 강화 등의 효과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고 과다 복용하면 심장병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고 장기 복용시 오히려 근력이나 발기력이 약화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므로 맹신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