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하이닉스호(號)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올 4월 30일 하이닉스반도체 이사회가 ‘하이닉스를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팔겠다’는 채권단의 결정을 뒤엎는 ‘대(大)반란’을 일으킨 이후 4개월여가 지나고 있다.
그러나 하이닉스는 독자생존과 3자 매각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기대했던 반도체경기가 살아나지 않아 기업가치는 4개월 전보다 더 떨어졌고 살 사람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됐다.
당시 하이닉스를 마이크론에 파는 것을 놓고 일각에서는 헐값 매각과 국부유출 시비를 제기했지만 결과적으로 “매각 안건을 부결시킨 하이닉스 이사회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금융계에서는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력누수 현상이 두드러져 책임있게 하이닉스 문제를 풀어나갈 주체가 없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하이닉스, 어쩔 수 없이 독자생존〓채권단은 실사기관인 모건스탠리 및 도이체방크와 하이닉스 처리방안을 작성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어 시간만 끌고 있다.
당초 7월 말 확정하기로 예정됐던 하이닉스 처리방안은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다.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메모리, 비(非)메모리, 초박막트랜지스터액정표시장치(TFT-LCD) 등 3개 사업 부문을 클린 컴퍼니로 쪼개 팔고 나머지는 기타법인에 몰아넣어 청산한다는 원칙만 세워놓고 있다.
첫번째 난제는 채무조정을 통해 3개 분할회사에 얼마만큼의 부채를 남길 것인가이다.
하이닉스는 6월 초 전환사채(CB) 3조원을 주식으로 전환해 부채를 줄였지만 여전히 총부채가 6조원이나 된다. 따라서 매출액을 고려해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여야 하는데 채권단 사이의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두번째는 분할된 회사를 살 인수자가 거의 없다는 점. 마이크론의 애플턴 회장은 최근 협상 재개 가능성을 내비쳤으나 마이크론 주가가 20달러 수준으로 폭락했고 실적도 3분기 연속 적자를 내고 있어 하이닉스를 인수할 만한 여력이 없다. TFT-LCD는 대만 캔두 컨소시엄과의 본계약 협상이 깨진 이후 진전이 없다.
현재 상태는 독자생존이 아니라 ‘대책 없는 연명’인 셈이다.
▽하이닉스 이사회의 판단은 옳았나〓4월 말 이사회에 참석했던 한 임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의의 초점은 메모리사업부문을 마이크론에 파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매각 후 남는 하이닉스 잔존법인의 생존 가능성이었다. 잔존법인의 예상매출은 연간 1조원에 불과한데 채권단은 3조6000억원의 부채를 남겨놓았다. 이사들은 회사의 부채가 너무 많아 생존할 수 없고 이를 승인하는 것은 하이닉스 주주들의 이익에 어긋난다는 결론에 만장일치로 도달했다.”
주식회사의 기본이념에 충실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반대의견도 많다.
A은행 고위관계자는 “회사가 망하면 잔여재산은 채권자가 먼저 상환받고 주주는 순위가 가장 밀린다. 하이닉스 이사회는 주주 이익을 챙기느라 ‘빌린 돈부터 갚아야 한다’는 더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고 말했다.
더욱 중요한 쟁점은 앞으로 하이닉스를 팔면 마이크론이 제시한 가격(38억달러) 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대우자동차 매각을 보더라도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2차 입찰에서 낸 가격은 1차 때의 절반도 안 된다.
B은행 담당임원은 “부실기업은 시간이 갈수록 속으로 곪기 때문에 채무조정이나 매각의 타이밍을 놓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며 “반도체업계에서는 연구개발(R&D) 및 시설투자를 제때 하지 못하면 선두와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져 적정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해법 없는 채무조정〓원매자를 찾으려면 지금 채무조정이라도 해놓는 것이 유리하지만 상황이 너무나 어렵다.
4월 말 하이닉스 이사회가 채권단 결정을 뒤엎은 가장 큰 이유는 무담보채권(3조5660억원)의 탕감비율을 실상(아서앤더슨이 추정한 회수율은 25.5%)보다 훨씬 낮은 50%로 정했기 때문. 이는 하이닉스 잔존법인에 남는 부채규모를 키웠고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반란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따라서 주요 채권은행은 이번 채무조정에서 무담보채권의 탕감비율을 현실화하자는 주장을 펼 방침이다. 주요 채권은행의 담당임원은 “무담보채권의 회수비율은 많아야 30%밖에 안 된다”며 “나머지는 어차피 못 받을 것이기 때문에 털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신한은행은 총 3960억원 가운데 627억원(15.8%)밖에 회수하지 못했다. 주요 채권자인 산업 우리 조흥은행은 내부이익금으로 하이닉스 여신 충당금을 80% 이상 쌓았기 때문에 추가로 채무조정을 해도 거의 부담이 없다.
그러나 투신권을 비롯한 2금융권은 담보가 전혀 없고 손실처리비율도 20% 안팎에 불과한 상태. 투신사는 일반펀드에 편입돼 있는 하이닉스 채권을 70%나 털어내면 고객들이 한꺼번에 수익증권을 해약하고 돈을 빼가는 대량인출사태(Bank Run)가 빚어져 대혼란이 빚어질 수 있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채권단이 4월 말에 탕감비율을 50%로 정한 것도 하이닉스 여신을 1조2520억원이나 갖고 있는 투신권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쉽게 말해 뾰족한 채무조정 방법도 찾기 힘든 상태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