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설날에 어선을 타고 탈북한 순종식씨의 둘째동생 봉식씨(오른쪽) 가족. 왼쪽부터 막내동생 대식씨, 어머니 이영순씨(98년 작고), 첫째동생 동식씨. 95년 설에 찍은 것이다. 사진제공 순봉식씨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도 했지만 형님 가족이 언젠가는 북한을 탈출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20t급 어선을 이용해 목숨을 건 북한 탈출에 성공한 순종식(荀鍾植·70)씨의 둘째 동생 봉식(奉植·55·대전시 중구 선화동)씨는 “막연하게나마 예상을 했지만 탈북자 뉴스를 듣다가 형님 가족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종식씨는 고향인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안골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지병으로 앓아 누운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를 짓다 1950년 7월 말경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봉식씨는 이번에 21명이 탄 탈북선의 선장으로 탈출을 주도한 종식씨의 큰아들 용범씨(46)를 통해 95년 처음 형님 가족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후 봉식씨는 압록강변인 중국 단둥(丹東)시의 동항을 세 번 다녀왔고 두 번이나 형을 만났다.
순종식씨의 둘째 동생 봉식씨가 19일 2년 전 중국 단둥의 동항에서 형님인 종식씨 등과 만났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당시 용범씨는 고기를 잡아 식량과 맞바꾸기 위해 중국을 자주 드나들었고 이 때문에 종식씨가 동생 봉식씨를 만나기 위해 북한에서 중국까지 나가는 게 가능했다.
첫 번째 만남은 98년 3월 이뤄졌다. 연락책인 ‘연길아줌마’를 통해 날짜와 시간을 정해 종식씨가 압록강변에 기다리도록 한 뒤 동생 봉식씨는 유람선을 타고 강을 거슬러가면서 인사를 나눴다.
“먼발치에서나마 형님을 봤다”는 말을 전해듣고 며칠 동안 눈물로 지새던 어머니 이영순(李英順)씨는 몇 달 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봉식씨는 2000년 12월에는 동항 인근 숙소에서 직접 형을 만나 사흘 동안 함께 지냈다. 종식씨와 함께 나온 조카 용범씨는 당시 “저도 이제 마흔 살을 넘겨 별 욕심은 없지만 자식들이라도 자유의 땅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살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하고요”라며 탈북 결심을 털어놨다.
“조카는 귀순할 경우 남한 정부가 어떤 지원을 해주는지 등을 물었어요. 그리고 현재의 고깃배로는 일을 도모하기 힘들기 때문에 20인용 중국 배를 사기 위해 10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봉식씨는 “귀국할 여비를 제외하고 남은 500∼600달러를 우선 건네주고 귀국한 뒤 다시 연락을 취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채 지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탈북이 조카 용범씨의 ‘용의주도한 계획’의 결실이라고 믿고 있다.
봉식씨에 따르면 용범씨는 중국 상인들과 밀무역을 했기 때문에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인맥을 이용해 충남 논산경찰서로 혈육의 생사확인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는 것. 용범씨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깃배를 몰았고 한때는 러시아에서 벌목공 생활을 할 정도로 생활력도 강했다. 또 어선을 몰기 때문에 10여일씩 집을 비워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 ‘탈북 구상’을 하는 게 가능했을 거라고 봉식씨는 말했다.
이날 종식씨의 귀순 소식을 접한 국내의 다른 가족들도 기쁨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천에 사는 막내동생 대식(大植·52)씨는 “꿈에 그리던 큰 형님을 만났으니 충남 논산과 홍성에 있는 부모님 묘소에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며 “형님이 죽었을 리 없다며 절대 호적정리를 하지 말라고 하시던 어머님이 형님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 아쉽다”고 말했다.
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순씨, 남한에 990명 살아▼
▽순씨(荀氏)의 유래〓중국 하내(河內·허난성 필양현 신향의 한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 순후(荀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순씨로 정했다고 한다. 본관은 충남 부여(扶餘)의 홍산(鴻山)과 임천(林川), 경남의 창원(昌原), 강원 강릉의 연곡(連谷) 등 4개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는데 이번에 탈북한 순씨 가족은 홍산이 본이다. 1930년 국세조사 때 충남 부여와 서천(舒川) 등지에 40여 가구와 전북에 1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때는 남한에 총 235가구, 9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