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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순덕]튼튼한 부시, 아픈 DJ

입력 | 2002-08-19 18:42:00


이달 초 종합검진을 받은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이 ‘보기 드물게 건강하다(extraordinary healthy)’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들은 56세인 부시 대통령의 심장과 폐 기능이 그 연배의 톱 1% 안에 드는 건강체질이라며 감탄했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지난해는 2% 안에 들었다는데, 그 나이에 보기 드물게도 1년 새 몸이 더 좋아진 모양이다.
간간이 시가는 피우지만 술도 안 마시고, 비타민과 아스피린을 매일 챙겨먹는 부시 대통령은 온갖 운동기구에도 수시로 매달리는 운동광으로 알려져 있다.
남의 나라 대통령이 건강하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는 게 시비 걸 일은 아니다. 그런데 왜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던 우리의 전직 대통령이 생각났을까.
▼우량아같은 미국 대통령▼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모든 것을 긍정적, 낙관적으로 보는 성격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여기엔 부시 대통령을 따라갈 통치자가 없다.
지구 반대편의 우리도 미국의 흔들리는 경제를 걱정하고 있는데, 그는 최근 휴가지에서 시민들을 초청해 마련한 ‘대통령 경제 포럼’에서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우리는 미국입니다”라고 천하태평하게 말했다. ‘악의 축’ 발언이 보여주듯, 세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단순 무모함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것임이 틀림없다. 악은 무찌르면 그만이니까.
이를 진작에 예견한 마이클 무어라는 발랄한 젊은 영화감독은 미국서 몇 달째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는 ‘멍청한 백인들’에서 “당신이 어릴 때 좋아했다는 책은 불행히도 당신이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후에 출판됐다”며 부시 대통령이 기능적 문맹은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다.
한때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을 우스갯소리로 삼았던 ‘동맹자’자격으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우리도 미국도 결코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고유명사로 굳어진 1997년 말, YS 집권말기의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남의 머리를 빌릴 생각도 않는 부시 대통령이 제 나라 경제난과 민주주의의 위기도 못 다스린 채, 악의 축 이라크를 무작정 공격해 석유값 폭등과 동시에 세상을 혼란에 몰아넣을까봐 나는 공연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량아처럼 튼튼한 부시 대통령이 되레 부럽다. 우리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올 들어서만도 여러 번 병치레를 한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19일 김 대통령은 을지국무회의와 수해대책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외부 인사도 접견했다지만 ‘깨끗이’ 완쾌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두 아들이 감옥에 있고, 야당과 민주당 일부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며, 믿을만한 사람도 다 멀어져간 사면초가 형편에서 고령의 건강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더구나 여성 카드로 쉽게 넘어갈 줄 알았던 장상(張裳) 전 총리지명자의 국회인준이 통절하게 거부된 데다 일생일대의 추진사업인 햇볕정책마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퇴임 후의 안녕을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용한 의료진이 어련히 잘 할 것을 알면서도 나까지 근심하는 이유는 ‘만일의 궐위’와 그에 따른 법률적 대비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대통령의 건강이 한 나라의 운명, 그리고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만약 대통령이 건강한 상태였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1944∼45년 병세를 분석한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역사학 명예교수 로버트 페렐이 저서 ‘죽어 가는 대통령’에서 쓴 대목이다. 루스벨트는 병 때문에 말년에 집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조차 원치 않았던 자신만만한 정치가였다.
▼국정 마무리에만 전념을▼
‘준비된 대통령’이었던 김 대통령이 얼마나 아는 것이 많고 국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챙기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총리가 할 일, 의원이 할 일까지 일일이 도맡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하겠다는 제왕적 태도가 자신과 나라를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이 아니던가.
동정표를 구할 의도가 아니라면, 이제는 입법 사법 행정부가 할 일은 각자가 하게끔 ‘엄호’하면서 대통령은 보다 넓고 깊은 시각으로 국정 마무리에만 신경 쓰기 바란다. 대통령이 건강한 모습으로 청와대를 떠나는 것도 국민에 대한 도리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