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장’이라는 군대가 있었다. 육 개월 짜리 장교라는 뜻이다. 석사장교라고도 불렸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시험을 쳐서 붙으면 넉 달은 훈련을 받고 두 달은 전방에서 실습소대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생활하는 것이었다.
전방으로 옮겨갔을 때 배속된 부대는 혹한기 훈련 중이었다. 겨울비가 오는 어느 밤, 비와 땀에 젖은 몸은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숙영지에 들어와서도 쉽게 잠도 오지 않았다. 이 여섯 달이 지나면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는 더 무거웠다. 군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이어폰 라디오를 틀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빗소리에 덮인 검은 밤을 찬란하게 물들이던 불멸의 알레그레토. 그것은 내밀한 만남이었다. 유보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의 경험이었다. 그때 만난 것은 음악이 아니고 이를 만든 사람이었다.
처음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입학 직후였다. 역시 라디오를 틀었을 때 나오던 진행자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웠다. “다음 들으실 곡은 베토벤 교향곡 7번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베토벤 교향곡은 수업시간에 들은 영웅, 운명, 전원, 합창 밖에는 없었다. 아홉 곡 중 나머지 곡들이 이름이 붙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악보분실’ 때문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오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7번 교향곡이라니.
격정과 흥분과 광기의 음악. 걷잡을 수 없이 밀어붙이는 7번 교향곡처럼 베토벤의 음악은 이후의 생활을 장악해버렸다. 공부는 학교공부가 아니고 음악공부였다. 사전을 사면 음악사전부터 샀고 전기를 읽으면 베토벤 전기부터 읽었다. 소설을 읽어도 베토벤을 모델로 했다는 장 크리스토프를 읽었다. 방에 틀어박혀서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살았다. 독일의 마인츠라고 하면 구텐베르그가 성서를 인쇄한 곳이 아니고 베토벤이 합창교향곡의 악보를 인쇄한 곳으로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그때 음악은 나의 영혼이었다. 분명 그 시기는 또 다른 집중과 열정의 시기였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음악 대신 침묵의 공간을 찾을 줄도 알게 되었다. 불처럼 태워버리기보다 물처럼 스며드는 그런 음악의 시간이 내게도 온 듯하다. 그러나 가끔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어 흠뻑 취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을 때는 7번 교향곡을 집는다. 디오니소스의 향연이라고들 부르는.
팀파니와 트럼펫의 격렬한 아우성 속을 헤쳐나가다 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이의 인생은 도대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을까.
서 현 한양대 건축디자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