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하사관이) 원근이를 죽였다는 사실만 인정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겁니다.”
허원근(許元根·당시 21세) 일병의 사망사건과 관련해 18년 동안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아버지 허영춘(許永春·63·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지회장·사진)씨는 20일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허 일병의 죽음이 군 당국이 밝힌 것처럼 자살이 아니라 타살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이날 발표가 나오기까지는 아버지 허씨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전남 진도에서 농사를 짓던 허씨는 84년 4월 2일 큰아들 원근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일을 돕던 원근이는 온화한 성격에 힘든 일도 잘 견뎌내던 씩씩한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자살할 아이가 아닙니다.”
더구나 머리와 가슴에 총을 세 발씩이나 쏴 자살했다는 사실을 허씨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현장사진을 봐도 아들의 시체에는 피 흘린 흔적이 별로 없어 의심이 들었다.
허씨는 청와대, 국회 등을 찾아다니며 12번씩이나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후 허씨는 법의학으로 아들의 죽음을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독학으로 법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허씨는 법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96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진정을 내 원하는 답변을 얻진 못했지만 “자살로 보기 어려우므로 국방부에 재조사하도록 권고하겠다”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또 이번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 때 조사관들에게 법의학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허씨는 88년 유가협의 의문사 진상규명 135일 농성에 참석한 이후 유가협 의문사지회장을 맡았다. 또 98년부터 진행된 유가족들의 특별법 제정을 위한 422일 농성을 주도하는 등 모든 의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애써왔다.
허씨는 “군 의문사가 철저히 규명되지 않는다면 국민은 군 전체를 불신하게 될 것”이라며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시한에 제한 받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허씨는 현재 아들의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해 놓고 있다. 가해자들이 진실을 인정할 때 아들을 땅에 묻을 생각이다.
한편 허원근 일병 사건의 경우 의문사진상규명위에 의해 타살로 밝혀지긴 했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은 불가능한 상태다. 형사소송법상 살인의 경우 공소시효가 15년으로 이 사건은 99년 4월로 공소 시효가 만료됐다.
또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지나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도 없다. 현재로서는 ‘공권력에 의한 사망’과 ‘민주화 운동 관련’ 여부가 입증될 경우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법에 의해 보상을 받을 수는 있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