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이 빨래를 줄에 널고 있다. 빨래는 수행일상의 한부분이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기도하다. 사진제공 현진스님
나이를 먹어 가는 탓일까. 요즘엔 밀린 빨래를 하고 있으면 괜히 궁상스런 생각이 든다. 새삼스레 독신의 고독 같은 것이 빨랫감에서 묻어난다.
특히 밀린 속옷과 양말을 한꺼번에 내 놓고 빨래판 앞에 앉으면 구질구질한 홀아비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난다.
수행자의 길이 독신의 삶이라면 빨래하는 일 또한 독신이 주는 훈장 같은 것이다. 수행의 길에서 빨래하는 일을 빼고 나면 하루에 3할 정도의 여유가 생길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빨래하는 수행을 예찬하고 즐긴다. 다시 말해 수행자는 빨래하는 일을 통해 독신 수행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홀로 걸어가는 삶의 방식을 배운다. 그러므로 독신은 고립의 상태가 아니라 공존의 자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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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나는 손빨래의 방식을 즐겨하는 편이다. 손빨래의 즐거움은 손으로 빨랫감을 만지고 눈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비누방울이 일 때마다 시꺼먼 때가 씻겨 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맑아진다. 어디 그뿐인가. 손으로 문지를 때마다 빨랫감이 조금씩 깨끗해지는 것도 즐겁고, 맑은 물에 설렁설렁 헹굴 때 느끼는 상쾌한 기분도 좋다. 아마도 이러한 맛이 없다면 내 일상에서 빨래하는 즐거움은 반감될 것이 분명하다. 세탁기가 아무리 편리하고 정교해도 이러한 손빨래의 즐거움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양말 한 짝이라도 내 손으로 세탁하고 나면 헌옷도 새 옷처럼 애정이 간다. 빨래하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나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일’은 수동적 입장이지만, ‘나의 일’은 주체적이고 긍정적 입장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처럼 한다는 것은, 한가지 일에 충실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남과 비교하는 태도는 일의 집중력과 능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마음 닦는 수행에도 어긋난다. 현재의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빨래를 하면 빨래하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청소하면 쓸고 닦는 일이 최선이라고 믿으면 된다. 그러면 스스로의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지금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면 노예적인 삶이 되기 쉽다. 어떤 일에 정해진 의미는 없다고 본다. 그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일의 가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나의 일’로 전환할 때 비로소 그 일에 대한 의미가 내 안에서 생겨난다.
손빨래를 할 때마다 ‘깨어있다’는 의미를 떠올린다. 깨어있다는 것은 순간 순간의 마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지금 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깨어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해인사 포교국장 budda122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