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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경영 ‘셰어링’ 시대

입력 | 2002-08-25 17:29:00



출입통제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 본관에는 최근 몇 달 동안 식품 전문기업인 풀무원의 관계자들이 ‘제 집 드나들 듯’ 오가고 있다. 삼성전자와 풀무원이 김치냉장고를 공동 개발하기 위해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했기 때문.

10여명인 이 TFT는 3월 이후 지금까지 모두 10여차례 모였다. 풀무원은 김치가 가장 맛있게 익는 방법에 관한 노하우를 제공하고 삼성은 이를 냉장고 만드는 기술로 실현할 예정. 영역이 전혀 다른 두 회사가 제휴해 만들어낼 새 김치냉장고는 내년 3월경 소비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셰어링(Sharing)’이 경영의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서로 다른 회사끼리, 심지어 경쟁사라도 필요하다면 서로가 가진 자원을 공유해 제품 기술 서비스를 만드는 사례가 늘어난 것. 같은 회사 안에서도 부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우수한 인력을 모아 특정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새 제품을 개발하기도 한다.

셰어링이 늘어나는 이유는 명료하다. 혼자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공유’가 중요한 가치로 나타난 것.

더욱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수준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산업 또는 제품간 융합현상도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따로’보다는 ‘같이’를 선호한다.

▽1+1은 무한대?〓최근 전략적 제휴를 발표한 LG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와 ‘종가집 김치’로 유명한 두산그룹 식품BG(Business Group) 직원들은 아예 ‘같은 회사’라는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있다.

조병구 LG전자 한국마케팅그룹 수석부장은 “단순히 김치냉장고 개발에만 협력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것을 공유할 예정”이라며 “월급은 서로 다른 곳에서 받지만 김치냉장고에 관한 한 같은 회사라는 생각으로 일한다”고 소개했다.

서로의 유통망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 앞으로는 두산의 식품BG와 LG의 김치냉장고 홈페이지는 서로 링크된다. 회원도 공유한다. 강원 횡성군에 있는 두산 공장 견학코스에 김치와 함께 LG의 김치냉장고도 전시된다.

삼성전자는 이에 앞서 화장품 전문회사 태평양과 제휴해 화장품 냉장고를 공동 개발했다. 태평양기술연구원에서 화장품의 최적 보관 조건을 시험해 자료를 삼성으로 넘겨 삼성이 이 조건에 맞는 냉장고를 만든 것.

이재승 삼성전자 기반기술그룹 수석부장은 “만일 삼성이 단독으로 진행했다면 1년 넘게 걸렸을 작업을 4개월여 만에 끝냈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표적 라이벌 회사인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서로의 제품을 공유하고 있다. 삼성은 LG에 캠코더를, LG는 삼성에 식기세척기와 가스오븐레인지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사내공유는 더욱 활발〓일본 소니의 노트북PC ‘바이오’는 97년 사내 복합팀이 만든 대표적 복합제품.

오디오 캠코더 등 가전제품과 연결되는 ‘네트워킹 PC’를 만들기 위해 이데이 노부유키 당시 사장은 오디오, 가전 디자인, 통신 등 각 분야 전문가를 동원했다. 그 결과 소형가전에 쓰이던 마그네슘 합금 케이스가 노트북PC에 적용돼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이 탄생했다. ‘바이오’로 듣는 음악은 웬만한 오디오만큼 음질이 뛰어나다.

SK㈜는 이제 원유 정제업체라기보다는 IT기업에 가깝다. 포털사이트 OK캐쉬백이나 운전자에게 지리정보를 제공하는 엔트랙 사업 등이 대표사업으로 자리잡았다. 이 사업들이 안착하는 데는 ‘퓨전팀’의 역할이 컸다.

사내 공모를 통해 전산실에서, 상품기획부에서, 주유소에서 각각 특장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새 사업의 틀을 짠 것.

삼성전자도 무선인터넷, 운영체제, 소프트웨어개발 등 분야가 다른 전문가들이 모여 무선핸드PC ‘넥시오’를 만들었다.

▽상생(相生)의 수단〓셰어링의 효과가 커지려면 서로 다른 조직문화를 뛰어넘어야 한다. 삼성전자 김치냉장고 개발팀장인 오석영 부장은 “우리는 타이밍을, 상대 회사는 내부 합의를 중요시하는 조직문화의 차이 때문에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비슷한 문제점을 풀기 위해 김쌍수 LG전자 사장과 박성흠 두산 식품BG 사장은 김치냉장고 공동개발 조인식을 가진 뒤 직원들에게 “협력은 서로 양보할 때 활성화된다”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상대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LG경제연구원 남대일 연구원은 “기업이 모든 분야에서 핵심역량을 확보하려 한다면 시대에 뒤진다”며 “역량이 없으면 남의 것을 빌리고, 이 과정을 통해 차세대 성장산업의 기회를 확보한다”고 설명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휴대전화와 카드업계처럼 예전에는 전혀 달랐던 산업분야가 어느날 경쟁자가 되는 식으로 경쟁이 다변화하고 있다”며 “이 같은 흐름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경쟁력 있는 제품을 내놓는 ‘타이밍’이 관건이므로 해외에서는 셰어링이 널리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