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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윤호진/다시 문화에 불씨를

입력 | 2002-08-26 18:13:00


8·15 광복 이후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서울 명동 한복판의 옛 국립극장이 복원된다고 한다. 1961년 설립된 이 국립극장이 75년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된 뒤 22년 만에 복원되게 된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최근 명동 옛 국립극장 외관을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600∼700석 규모의 중형 극장으로 리모델링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간 명동 상가번영회와 문화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극장 복원 운동을 전개하면서 ‘명동 살리기’에 힘쓴 덕에 어렵게 이루어낸 값진 결과다.

▼삶의 질 높이는 지름길▼

2005년 10월이나 되어야 새 극장의 꼴을 볼 수 있다지만 필자는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신출내기 시절 그 무대에 서 봤던 나 같은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배고팠으나 아름다웠던 추억을 떠올려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작가 고(故) 이해랑 선생을 비롯해 가수 김정구, 배우 김희갑 등 이미 작고하신 분들의 숨결까지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만 같아 감개가 무량하다.

이번 복원 사업은 우리 사회가 삶의 질을 고양하는 데 있어 공연문화 인프라가 갖는 중요성에 점차 눈을 뜨는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질보다 양을 추구하던 경제개발 시절, 이 극장을 없애고 각종 상가와 오락시설들이 들어차면서 서울의 심장인 명동은 천민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해 왔다. 일제강점기부터 맥고모자에 ‘백구두’로 한껏 멋을 내고 이곳을 한국의 문화적 심장부로 만든 터줏대감들은 오랫동안 쇼핑객과 향락객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변방으로 밀려나야 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사람들이 정을 두고 머물지 않으면 죽은 장소가 된다. 명동은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그곳에 정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을 문화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정신적 휴식을 느낄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일부 문화예술인들의 소망은 호객꾼들의 고함 속에 묻혀 버렸다. 자연 명동은 밤이면 쇼핑 전단 쓰레기와 오물이 넘쳐나면서 ‘밝은 동네(明洞)’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암울한 ‘공동(空洞)’이 되어버렸다. 도시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을 달고 빤질빤질한 타일을 덧댄다고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문화가 깃들어야만 도시가 밝아진다는 사실은 100년이 넘은 후줄근한 건물들이 가득한, ‘세계 문화 수도’로 자칭하는 뉴욕의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명동 국립극장 복원이 국내에 턱없이 부족한 공연극장의 인프라를 갖추는 첫 단추가 되길, 서울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문화 수도로 거듭나는 첫걸음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란다. 이것은 단지 예술계 종사자이기 때문에 갖는 이기적 바람만은 아니다. 요즘 국민은 일주일에 이틀을 쉬게 됐다지만 많은 사람이 막상 무엇으로 여가를 보내야 할지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다고, 교외로 나가서 고기 몇 점 구워 먹는다고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닐 터. 다양한 문화생활이 주는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에너지를 널리 공유하는 것이 해답이 될 것이다.

현 정부가 음성적 정치자금을 문화사업 지원금으로 양성화하기 위해 만든 기업 메세나 운동도 결국 수박 겉 핥기식 제도가 되어버렸다. 이번 명동 국립극장 복원을 계기로 국내 문화 공간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새로운 메세나 운동을 전개해 보면 어떨까 싶다. 정부는 활용되지 않는 공공용지를 골라 기업에 임대해 주고, 기업은 극장 같은 문화시설을 건설해 운용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많은 예술인들이 꿈의 날개를 펼 장소가 없어서 새벽 쓰린 가슴에 쓰디쓴 소주를 붓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문화공간 인프라 확충을▼

필자도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공연 전용극장 건립을 추진 중이지만 아직 문화 인프라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잠시 공연 인프라를 갖추는 비용을 ‘투자’로, 관람객의 다소를 ‘수익’으로 간주한다면 계산기를 두드려보나마나 명동 상가보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20년을 보내면서 명동의 상인들은 결국 극장을 복원하자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적 인프라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와지붕을 올려다보면 바람결에 날아와 쌓인 작은 흙에 어디선가 날아온 풀씨가 생명을 피우곤 한다. 이번 명동 국립극장 되살리기는 바로 회색 도시의 심장에 날아와 쌓인 작은 흙덩이와 같다. 여기에 아름다운 풀꽃이 피어나길 소망한다. 그래서 잿빛 서울이 그런 작은 풀꽃으로 인해 환해지기를, 그래서 서울과 한국이 모두 밝은 동네 명동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윤호진 연극연출가·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