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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기 세상읽기]파우스트가 너덜너덜해진 까닭

입력 | 2002-08-30 17:48:00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는 일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삼십년 동안 내 손에서 너덜너덜해진 책이 있다. 1966년 일조각에서 펴낸 괴테의 ‘파우스트’다. 말하자면 이 책도 내 청춘과 함께 늙어가서 한번씩 향수어린 심정으로 펼쳐들 때마다 가장자리가 조금씩 바스러져 나가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이 책에 빠져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건성으로 한번 읽고 책장에 꽂아 두었던 이 책을 두 번째로 뽑아 들었던 것은 대학에서 첫 강의를 맡게 되었을 무렵 우연히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읽고서였다. 그때 새삼 경이로운 마음으로 이 책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이래, 다시 먼지더께가 그 위로 내려덮게 했던 적은 없다.

이 책은 알려진 대로 평생을 서재와 강의실에서 보내던 노석학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젊어진 모습으로 모험과 편력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줄거리로 이뤄져있다. 그러나 보통의 독자라면 이 책을 덮은 뒤에 이런 물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파우스트가 구원을 얻는가. 악마에게 붙들려 온갖 끔찍한 죄를 저지른 이 패악한 영혼이 어떻게 천사들과 함께 승천할 수 있다는 거냐. 당연한 의문이다.

순결한 처녀 그레첸을 유혹해서 사생아를 낳게 하고, 훼방꾼인 모친을 독살하도록 사주하고, 결투라는 허울로 오빠를 죽이고, 사생아를 강에 버린 그레첸 자신이 영아 살해죄로 처형되게 하는 등 이 모든 끔찍한 비극이 모두 악마의 힘으로 다시 젊어진 파우스트로부터 비롯된 죄악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파우스트’에는 단순한 선, 악의 윤리적 문제보다 훨씬 더 심오한 사상이 녹아있다. 그것은 삶 자체와 만나는 것 즉 이 대지의 켜와 결을 살과 뼈로 만나고, 삶의 주름과 단층들을 혀와 가슴으로 맞대는 방식들에 관한 것이다.

파우스트는 기나긴 편력 끝에 숨을 거두며 유언처럼 이 말을 남긴다. ‘지혜의 결론은 이것이니, 삶은 그것을 누리는 자의 몫일 뿐이다.’

그가 죽고, 악마가 그의 영혼을 거두어 가려고 왔을 때, 천사들이 파우스트의 무덤 위로 수천 송이 장미꽃을 뿌리면서 부르는 우렁찬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탐색하는 영혼 파우스트는 구원을 얻었노라.’

물론 허탈감에 사로잡힌 메피스토펠레스가 천상에 대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이건 내기에서의 반칙이다. 신이 꼼수를 쓴 거다. 어찌 신이 그럴 수 있느냐. 이런 악마의 항변은 당연하다. 숱한 세월 공들여 키운 먹이를 순식간에 빼앗기고 닭 좇던 개꼴이 되고 말았으니. 악마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독자들도 바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작품의 첫 대목인, ‘천상의 서곡’으로 돌아가야 한다. 악마가 먼저 제안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파우스트를 제가 타락시켜 볼까요?’ 신은 그 내기를 기꺼이 받아 들이면서 이런 단서를 덧붙인다. ‘무엇인가를 찾는 동안은 인간은 방황하게 마련이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악마가 이미 내기에서 승리라도 한 것처럼 큰소리치자, 신은 다시 이런 말을 들려준다. ‘너는 인정해야할 거다. 선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 휩쓸릴 때조차 자신의 옳은 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작품 2부에서 파우스트는 격동하는 삶의 힘겨운 수난 속에서도 자기 뜻을 놓치지 않는 숭고한 영혼의 역정을 보여준다.

이 책을 처음 숙독한 이래, 숙독을 거듭하면서 나 자신 파우스트를 따라 그렇게 살려고 애써왔다. 내 영혼을 구매해 줄 메피스토펠레스가 없었고, 내 실족에 밟혀 줄 그레첸도 없었으나, 나는 삶의 언저리를 충분히 서성거렸고, 배회했고 방황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나는 오늘도 내 서재에서 삽살개로 위장한 악마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풍진만장한 저잣거리로 내몰기 위해 달래고 꼬시고 유혹하고 협박한다. 무엇인가를 찾아서 방황하는 파우스트적 삶이란 결국 소크라테스가 말한 ‘음미하는 삶’과 통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변명’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으니 말이다. ‘아테네 인들이여 이 말을 기억해두라.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왕주 부산대 윤리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