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 라니냐 현상 등으로 인한 기상의 급변과 사회기반 시설물의 고밀도화 등으로 오늘날 각종 재해로 인한 피해는 다양화 대형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그 피해의 강도가 국지적으로 커지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어 방재 대책이 한층 더 충실해지고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비비로 편성돼 집행 지연▼
강력한 태풍 ‘루사’는 지난 주말 한라산과 지리산마저 무시한 채 직통으로 한반도 남해안 한가운데로 상륙해 동해안 쪽으로 훑고 지나가면서 전국 곳곳에 엄청난 강풍과 물을 퍼부어 인간의 과학과 기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버렸다. 다행히 인공위성을 통해 그 움직임을 어느 정도 미리 알 수 있어 대비할 수는 있었지만, 대비 수단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많은 곳에서 저수지가 넘치고 제방이 무너져 물천지가 빚어졌고, 산비탈이 무너져 차들이 흙더미 속에 묻히기도 했다. 130명 이상의 사망과 실종이라는 인명 피해뿐 아니라 상수도와 하수도, 가스선, 전력선, 통신선, 그리고 각종 교통로 등 국가 기간시설들이 훼손되거나 붕괴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피해만 읊고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일어서기 위한 근본대책을 바로 세워야 할 때다. 그 중의 하나가 각종 피해 시설을 개량복구하기 위한 방재 계획 규모의 재설정이다. 우선 그동안 각종 재해 대책에 적용돼온 ‘발생빈도’ 개념에서 벗어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상관측 이래 최악의 폭우(하루 900㎜)’라는 강릉지역 강수량의 예에서 보듯이 몇 십년, 혹은 몇 백년 만의 재해가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기상이변 속에서 발생빈도에 입각한 계획 규모는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 학계와 각종 설계기준을 설정하는 정부기관들은 급변하는 기상조건에 대응해 지금까지 편의적으로 사용해온 발생빈도 기준을 철저하게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저수지 규모, 하천 폭과 제방 높이 등 하천 규모, 유수지 및 배수시설 규모 등을 결정할 때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발생빈도 기준은 이제 모두 ‘표준규모’ 기준으로 바꿔야 한다. 표준규모는 최적의 효과를 내는 기준이다. 방재에 많은 비용을 들일수록 위험도를 낮출 수는 있다. 그러나 정부나 자치단체가 감당할 수 있는 재정은 제한돼 있으므로 비용 증대에 따른 위험도 감소의 경향을 상세히 분석해 대안 전략들을 수립하여 ‘표준규모’를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한편 도로현장의 지질구조적 특성을 외면한 채 산지(山地)의 절개면(切開面) 경사기준도를 획일적으로 잘못 적용하는 일도 반드시 개선해야 할 사항이다. 산세와 도로 사정, 바위의 결 등 현장상황을 봐가며 절개지의 경사각도를 정해야 하는데도 기준을 무리하게 일률적으로 적용해 산을 깎아내는 바람에 산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간접자본(SOC)’을 흑자와 적자의 금전출납부적인 개념으로 인식하는 등 사회간접자본의 방재 효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이는 방재의 경제성을 충분히 인식해 피해 방지 또는 경감의 경제적 가치를 정량화해 국가경영에 반영하고 있는 선진국들의 사례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재해의 발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 경감을 위한 예방적 대처 능력을 개발해 그 피해를 상당량 줄일 수는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복구비’가 정부예산에서 ‘예비비’인 것도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회계제도에서 복구비를 ‘예비비’가 아니라 ‘경상비’로 전환해 필요할 때 즉각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집행의 지연은 이 예산이 갖는 본래의 목적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예산집행과 부적절한 소비행태를 조장할 수도 있다.
▼절개면 경사 획일적 적용안돼▼
아울러 불합리한 피해지원 규정을 하루빨리 정비해야 한다. 정부의 ‘보상’이나 ‘배상’이 아니라 ‘지원’의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 또 일반 국민이 방재활동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화재 홍수 지진 등 각종 재해에 대비한 ‘방재 보험산업’을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정부 당국은 방재 안전이 ‘시민복지의 기본조건’인 생존의 문제임을 깊이 인식해 국가재원을 일반 복지 부문보다 방재 안전 부문에 우선 배당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해복구사업을 포함한 치수 방재사업은 긴 기간과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조원철 연세대 교수·토목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