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호우로 잠겼던 마을이 태풍으로 다시 물에 잠기자 한 주민이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 합천연합
▼상처깊은 김천▼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지. 이게 무슨 난리야….”
태풍 루사로 인해 물바다로 변한 경북 김천시. 2일 오후 김천시내는 고였던 물이 빠지고 진흙이 마르면서 군데군데 황톳길로 변했다. 차량들이 움직일 때마다 진흙가루가 날려 뿌연 먼지가 시내를 덮었다.
이번 태풍으로 범람한 감천 옆 황금동. 7000여명의 주민 중 대부분이 침수피해를 봐 곳곳에는 쏟아져 나온 쓰레기가 진흙탕에 범벅이 돼 길을 찾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황금시장에서 25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강길룡(姜吉龍·62)씨는 “물이 밀려올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며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강씨의 부인 우봉선씨는 “물에 섞여 밀려온 나무토막에 맞아 허리와 다리를 다쳤다”며 악몽 같았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2일부터 황금동 일대에는 주민과 공무원, 군경이 나서 복구작업을 펴고 있지만 수돗물이 끊겨 주민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감천 옆에 위치한 김천수도사업소가 물에 잠겼기 때문. 수돗물 공급이 이번 주 안에 가능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주민들은 급히 모터를 구해 지하수를 퍼 올려 겨우 청소를 하고 있는 정도. 지하수가 나오는 집 앞에 물통을 들고 기다리던 주민들은 “급수차에서 받은 물로는 밥짓기에도 모자란다”며 “언제 수돗물이 나올지 알 수도 없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황금시장 상인들은 물에 젖은 물건들을 햇볕에 말리며 하나라도 건지려고 애썼지만 대부분 팔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물에 집이 몽땅 잠겨버린 시장 입구의 이홍영씨(49) 가족은 골목에 가재도구를 잔뜩 꺼내놓았을 뿐 손을 놓고 있었다. 이씨는 “잠잘 방도, 밥할 물도 없어 이틀 동안 시내에 있는 친척집에서 지냈다”며 “볕에 살림살이를 말려봐야 소용없어 모조리 버려야겠다”고 말했다.
황금동 일대 주택가 골목에는 집집마다 내놓은 물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쓸만한 것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는 한복가게 주인 이모씨(58)는 “평생 가꾼 가게가 한순간에 사라져 누굴 원망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진흙 속에 파묻힌 한복을 울면서 어루만졌다.
한 주민은 “지난달 31일 오후 7시경 집과 상가에 물이 찼는데 8시경에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왔다”며 “속수무책으로 집이 엉망이 돼 화가 치민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민들과 함께 복구작업에 나선 황금동장 윤화식(尹和植·51)씨는 “수돗물이 빨리 공급돼야 동네가 본래대로 회복될 것”이라며 “지금은 젖은 물건을 말리고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시내 외곽지의 구성면 조마면 지례면 일대는 전기와 수돗물은 물론 마을진입로마저 붕괴된 곳이 많아 더욱 고통을 받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목을 축일 물도 구하지 못해 빗물을 끓여 마시는 등 ‘난민생활’을 하고 있어 수인성전염병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차가 마을까지 들어갈 수 없어 생수통을 짊어지고 옮기던 주민들은 “제발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김천시는 급수차와 소독차를 동원해 물을 공급하고 소독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마을로의 진입이 어려워 애를 먹고 있다.
김천〓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천연기념물등 문화재 66점 훼손▼
제15호 태풍 루사로 인해 천연기념물 제297호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 왕버들이 유실되는 등 문화재 피해도 적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문화재청은 2일 “사적 천연기념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와 지방문화재 66건이 피해를 봤고 총 피해액은 27억원”이라고 밝혔다.
이번 태풍으로 가장 피해가 큰 것은 하천변이나 야산 등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높이 19m에 수령이 300년이나 된 청송 왕버들은 불어난 강물에 뿌리가 뽑히고 나무 중간이 부러진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제주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성읍민속마을 팽나무는 한쪽 가지가 부러졌고 천연기념물 제379호인 제주 서귀포시 천지연 난대림(暖帶林)은 천지연폭포 서쪽 비탈 150m가량이 사태가 나면서 적지 않은 피해를 봤다.
부산 금정구 생지봉(해발 638m)에 자리한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은 제1망루가 붕괴됐다. 이번에 붕괴된 망루는 2000년 태풍 사오마이가 불어닥칠 때 한 차례 붕괴돼 보수공사를 했던 곳이다.
사적 제18호인 경북 경주 안압지의 경우 건물 지붕이 5m가량 파손됐고 신라 초기의 왕성이었던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도 토성 벽이 일부 붕괴됐다. 사적 제404호인 전남 나주시 복암리 고분군도 일부 봉분이 유실됐다. 강원도 지방문화재인 강릉시 경포대도 석축이 훼손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드러나는 피해실태▼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간 2일 전국 곳곳에는 처참한 수해현장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관동팔경 중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강원 경포대 절벽 아래. 수백년 된 아름드리 벚나무들을 포함해 인근의 나무 60여그루가 뿌리째 뽑혀 뒤집어져 있고 경포대 난간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명승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관광객 김모씨(40)는 “아름답던 경포대의 모습이 이렇게 처참하게 변한 것을 보니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강원 삼척시 오십천 주변도 쑥대밭으로 변했다. 발원지인 도계읍 미인폭포에서부터 성내동 죽서루둔치까지 38번 국도를 따라 45㎞에 이르는 오십천 주변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29일부터 36억 아시아인들의 축제가 열리는 부산에서는 아시아경기대회의 각 경기장 시설이 파손되는 피해를 봐 대회 운영에 차질이 예상된다.
개·폐회식이 열리는 연제구 거제동 아시아드주경기장의 천장덮개 30여곳이 파손된 것을 비롯해 강서구 하키경기장의 관중석 지붕막이 파손됐고 금정체육공원 농구경기장에서는 천장에 누수현상이 나타났다. 또 조경수 수백그루가 부러지거나 뽑혀 조경작업을 새로 해야 할 처지다.
경남의 경우 낙동강 수계 14곳이 붕괴됐거나 누수 혹은 범람해 5000여가구 1만여명의 주민이 피해를 봤거나 피해가 우려돼 대피한 상태다.
지난달 한 차례 붕괴됐다가 임시로 설치했던 함안군 법수면 백산둑 임시물막이와 주물둑, 대산면 하기둑 등에서 1일부터 물이 새는 것이 발견돼 25개 마을 2800여가구 주민 8000여명이 현재 불안한 표정으로 낙동강 수위를 지켜보고 있다.
창녕군 남지읍 칠현면 고곡둑과 이방면 송곡배수장 송곡둑에서도 누수현상이 발생해 10개 마을 700여가구 주민 2000여명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감귤 화훼 등 재산피해가 막대한 제주지역에는 수산물 피해도 막심했다. 넙치를 생산하는 육상양식장이 바람을 이기지 못해 파손됐으며 황돔과 우럭 등을 기르는 제주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 가두리양식장 4500여평이 통째로 훼손됐다.
한편 2일 오후 경남지역 최대의 배 재배단지인 진주시 문산읍 원촌리에서는 경남도 공무원 200여명이 이번 태풍으로 떨어진 배를 주워 모아 쓸만한 것들을 선별한 뒤 옮기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2일을 ‘수해 복구의 날’로 정한 경남 도내에는 이날 6000여명의 공무원과 군인 경찰 등이 함양과 김해 합천 등지의 수해현장에 투입돼 쓰러진 벼 세우기와 청소, 둑 보강작업 등을 지원했다.
벼 500여㏊가 쓰러진 전남 고흥군 포두면 해창만 간척지에서도 이날 공무원과 군인 등 600여명이 투입돼 벼를 세우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이날 전남지역 수해현장 곳곳에서는 민관군 등 2만여명이 나서 복구작업을 벌였다.이번 태풍으로 500㎜의 폭우가 쏟아져 수확을 보름가량 앞둔 벼 7㏊가 흙과 자갈에 묻혀버린 지리산 자락인 전북 남원시 운봉읍 소석마을 등 남원과 무주 일대에는 이날 하루 2800명의 인력이 동원돼 복구작업을 벌였다.
부산〓조용휘기자 silent@donga.com
춘천〓최창순기자 cschoi@donga.com
전주〓김광오기자 ko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