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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박재창/정치개혁 시민이 나서자

입력 | 2002-09-03 18:36:00


오늘부터 1주일 후면 미국의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건물에 대한 비행기 테러가 있은 지 꼭 1년이 된다. 그런 만큼 요즈음 미 연방정부나 자치정부는 추모행사 준비에 한창이다. 특히 뉴욕시 정부는 대대적인 추념식 준비에 분주하다는 소식이다.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시민 스스로가 다양한 형태의 추모행사 준비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한 희생자가 즐겨 찾던 동네 체육관에서는 최근 운영위원회를 열어 체육관 이름을 희생자 기념 체육관으로 고쳐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필자가 속해 있는 연구소에서도 추모 다과회를 열어 사건의 성격과 의미를 반추해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희생자에게 보내는 추모엽서 그리기를 계획 중이라고 한다. 모두가 시민 스스로 자청해서 하는 일이다.

▼월드컵때 맛본 ´참여의 힘´▼

우리가 3·1운동이나 6·25전쟁에 대한 추모를 정부가 주관하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기념식 하나 달랑 치르는 것으로 끝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웅산 테러가 애써 국민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거나 의도적으로 외면되는 현상과도 크게 다르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미국 시민사회 특유의 자발적 주체의식과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생활태도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시민사회단체의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사회참여 현상이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부에 대한 감시자나 평가자의 성격을 띠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직 사회 경영의 능동적 주체자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셈이다. 월드컵 과정에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놀랐던 이유 중의 하나도 우리 사회가 바로 이 자발적 주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아직 이 자발적 주도와 참여의 경험이 일천할 뿐만 아니라 정치권역에까지 확산되어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바로 시민의 이 정치적 주체의식 결여가 우리 정치의 ‘소수인 중심주의’를 낳게 된 주범 중 하나라고 말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설명이 되고 마는 것일까. 그 선후야 어찌되었건 소수인 정치의 극복을 위한 현실적 대안의 하나가 정치과정에 대한 시민의 능동적 참여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소수인 중심의 정치 내지는 정상배에 의한 정치 독과점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시민 스스로가 정치권역의 주체자로 나섬으로써 정상배가 정치권을 선점하지 못 하도록 견제하는 일 외에 다른 왕도가 없다.

연말로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정치권은 벌써부터 샅바싸움에 한창이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민생 현안이 심도 깊게 논의되거나, 지난 5년간의 집권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통해 다음 정권의 귀감이 될 국가 운영지표를 천착해 본다는 일 따위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여야 간의 정략적 대처로 정치 정상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다시 한번 외면될 모양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최대 화두가 정치 정상화에 있고, 그런 만큼 대통령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최선의 전략이 정치개혁의 주도에 있다는 사실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치권이 스스로 외면한 채 엉뚱한 경쟁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정치개혁의 과제를 정치권에 맡겨두는 한 결코 성사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정치개혁 과제는 국민 스스로가 정치의 능동적 주체자로 나서는 일 없이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교훈을 깊이 깨닫게 된다.

▼지식인들 ´전국연대´조직을▼

9·11테러 1주기를 앞두고 미국의 시민사회가 스스로 추모행사를 조직하거나 주도해 나가는 것처럼, 우리도 정치과정에 대한 시민 스스로의 능동적 참여를 통해 정치 정상화의 길에 나서지 않는 한 정치개혁의 과제는 결코 손쉽게 달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지식인들이 시민협약 운동에 나서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어떤 정책이나 프로그램의 실천을 정치권에 주문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의 전국적 연대를 조직하고, 이를 토대로 기성 정치권에 압력을 가해 집권 이후 정치개혁 과제의 집행권을 도급 받는다면 어떨까. 앉아서 기다리는 자에게 정치권이 알아서 개혁의 과실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이제 거두어야 마땅하겠다. 이번의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시민의 능동적 정치참여 시대가 열리기를 염원해 본다. 그런 변화 자체가 정치개혁의 본질이기도 하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미국 버클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