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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백화점 “포장도 상품이다”

입력 | 2002-09-03 18:46:00


4월 초 롯데백화점은 23년간 써 온 상품 포장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작업은 은밀히 진행됐다. 특별팀이 구성됐고 디자인 업체와 포장지 제조업체 사장 10여명은 비밀준수 각서까지 썼다.

추석을 겨냥한 롯데의 시도는 포장 디자인과 단위를 바꾸고 포장 기능성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번에 포장을 바꾼 품목은 모두 150개로 추석 선물용품 매출액의 80%가량을 차지한다.

롯데 상품본부의 정승인(鄭勝仁) 상품3부문장은 “포장 효과로 추석 선물 매출이 지난해보다 20% 이상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선물의 품격을 높여 할인점과 차별화하는 게 포인트”라고 말했다.

포장이 상품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상품’이 됐다. 숙명여대 문정숙(文貞淑·소비자경제학) 교수는 “포장 자체도 하나의 브랜드”라면서 “상품의 품질 차이가 줄면서 이런 현상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포장의 고품격화〓유명 백화점들이 오랫동안 천편일률적으로 갈비세트를 담아온 청록색 또는 자주색 나일론 가방은 이번 추석부터 사라진다. 그 자리를 고급스러운 색상의 부직포(不織布) 가방이 대신하고 있다.

포장에 돈과 정성이 담기고 있다. 2000년부터 주요 백화점들이 대대적인 ‘포장 바꾸기’에 나서 갈비 세트 포장에 인조가죽을 쓰는가 하면 제품보다 포장이 더 비싼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제품도 나왔다.

불과 2∼3년 전에는 백화점의 이미지를 풍기는 ‘통일적인 포장 디자인’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큰 변화다.

포장에 쓰이는 재료도 최고급품이다. 신세계는 최근 단골 고객 중 1% 이내에 해당하는 1600여명의 VIP고객에게 보낼 선물을 담기 위해 고급 종이함을 따로 만들었다. 개당 원가만도 1만3000원선.

장(醬)류 제조업체인 해찬들은 올 상반기에 고급 고추장 ‘정월청장’을 내놓으면서 유명 도예가가 직접 구운 전통 옹기에 담았다.

전통 식품 제조업체인 명가어찬은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선물세트인 ‘고추장 굴비’를 시중가가 3만5000원이 넘는 옹기에 담았다. 이 굴비를 다시 수작업으로 일일이 고급 한지에 싸서 납품했다.

신세계 백화점부문 마케팅실 심상배 상무는 “할인점이 자리를 잡으면서 백화점은 단순한 소매 매장이 아니라 ‘품격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필요가 생겼다”며 “겉면을 우아한 디자인으로 만들기 위해 상자 겉에 쓰던 원산지 등을 설명서로 따로 제작해 내지로 끼우는 등 세심한 마무리 작업은 수없이 많다”고 말했다.

▽먹고 간수하기 좋게〓상품의 포장 단위도 정교해졌다. 설에만 해도 롯데백화점은 갈비와 정육세트를 3㎏, 4㎏ 등 ㎏단위로 구분했으나 이번 추석에는 성인 2인이 한끼 먹기에 알맞은 용량인 800g단위로 줄였다.

현대는 건과나 멸치, 육포 등의 건어물세트의 경우 2㎏, 3㎏짜리를 한꺼번에 포장하던 것에서 보관하기 쉽게 120∼200g으로 나눠 담았고 신세계는 이번 추석부터 청과세트에서 15㎏과 10㎏짜리를 각각 7.5㎏, 5㎏ 등 절반으로 줄였다.

신세계 이창승 대리는 “설 뒤 고객 조사를 해보니 청과 등은 신선도가 금방 떨어지므로 소량 포장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생선이나 야채 등 손이 많이 가는 상품들은 손질된 상태로 나온다. 현대홈쇼핑은 지난해 한 마리를 통째로 팔던 갈치세트를 올해는 15㎝ 길이로 잘라 판다.

CJ39쇼핑은 곧장 요리할 수 있게 다듬은 고등어 20마리를 한 세트로 팔면서 2마리씩 개별 포장했다.

이 회사 오천석 과장은 “한 두름씩 팔다가 소량 포장하면서 생선 매출이 60% 이상 뛰었다”며 “가족 구성원이 줄고 맞벌이가 느는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번 쓰고 버린다고?〓명절마다 종이상자, 스티로폼상자, 포장지 등 선물의 ‘파편’을 처리하는 데 골머리를 앓던 것도 옛말이 되고 있다.

신세계는 올해 처음으로 헝가리산 ‘도까이’ 와인을 에어백에 일일이 포장했다. 첫 번째 기능은 병이 깨지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이후에도 물놀이용이나 베개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각종 스티로폼상자는 피크닉용 아이스박스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도록 제작되고 있다.

신세계가 VIP용으로 별도 제작한 고급 지함의 겉에는 ‘신세계’라는 글자나 마크가 없다. 처음 디자인은 신세계 마크가 있었으나 고객이 이후에도 상자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면 백화점 표시가 없는 게 낫다는 품평회 반응에 따른 것.

포장의 역할도 단순히 상품을 ‘감싸거나’ ‘뚜껑을 덮는’ 수준에서 내용물의 상태를 최적으로 유지시키는 ‘기능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건과나 멸치 등 마른 식품은 탈산소제를 이용해 공기 중의 산소만을 제거한 ‘산소제거 포장’을 했다. 산화를 막아 상품이 변질되지 않고 실온에 상당 기간 두어도 선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옥돔 등 생선류는 진공 포장한다.

포장패키지 전문개발업체인 그린디자인연구소 김미정 팀장은 “포장에 따라 매출이 1.5배가 되거나 거꾸로 제품이 시장에서 철수하는 사례도 있다”며 “포장이 매출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