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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똑똑한 아파트, 똑똑한 주부들

입력 | 2002-09-05 16:21:00

서울 광진구 군자동 모 교회 부설 어린이선교원의 텅 빈 복도. 전영한 기자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대림아파트 단지. 평범한 아파트 단지에 불과하고 주민들의 경제적 수준도 그리 높지 않다. 다만 단지 규모가 꽤 크고 지어진 지1년밖에 되지 않은 덕분에 ‘정보화 마을 시범단지’로 지정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수준을 따지지 않고 실제로 실현된 수준을 따지자면 이 곳은 국내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이버아파트 단지다.

첨단 사이버 아파트살이 1년, 주민들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홈페이지 주변 교통상황 생중계

이 아파트에 사는 회사원 이진원씨는 출퇴근길에 나서기 전 먼저 자신의 아파트 홈페이지를 연다. 아파트 주변 교통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홈페이지에서 ‘아파트 생중계’라는 아이콘을 클릭하자 아파트 주변의 경인로, 구로공구상가 앞길, 서부간선도로 등 3곳의 도로상황이 화면에 잡힌다. 아파트 단지 옥상에 설치된 웹카메라가 멀리서 잡은 모습이다. 직장이 경기 안산에 있어 서부간선도로를 주로 이용하는 이씨는 “출근길 선택을 위해 주로 이용하지만 퇴근할 때도 교통혼잡이 풀리는 모습을 보고 퇴근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주부 김미화씨는 다섯 살짜리 아들을 단지 내 유치원에 보내고 있다. 유치원에 어린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자식이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지, 아니면 혼자 따돌림을 받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다행히 이 유치원에는 웹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유치원에서는 매주 금요일 한번씩 반별로 아이들을 웹카메라가 설치된 방에 들여 보내 학부모들이 인터넷으로 볼 수 있게 했다. 다섯 살 ‘분홍반’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금요일 오전 11시50분에서 정오까지. 김씨는 “1주일에 단 10분이지만 명랑하게 친구들과 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 1주일 내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모두 27개동 약 2500가구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는 올 2월까지 거의 모든 가구에 인터넷 전용망이 깔렸고 인터넷 폰, PC용 웹카메라 등이 설치됐다. 보급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아파트 건설회사인 대림산업이 무상으로 장비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비만 제공한다고 주민이 저절로 ‘사이버 주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 아파트 생활의 주역이지만 살림만 해온 주부들이 직접 이런 시설과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곳의 인터넷 정보망을 관리하는 대림I&S의 김정기 대리는 “인터넷 전용망을 깔아주고 인터넷 폰과 PC용 웹카메라를 나눠줬지만 사용에 익숙하지 않거나 아예 사용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비싸게 나눠준 장비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컸다”며 “안되겠다 싶어 관리사무소 옆에 정보문화관을 만들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활용법, 인터넷 화상통화 등에 대해 교육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월부터 매월 10개반으로 나눠 교육을 실시한 결과 현재 이곳 주부들의 상당수가 인터넷 폰과 PC용 웹카메라까지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주부들끼리 화상전화를 주고받는 일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주부 정미경씨는 “인터넷 폰 덕분에 시외 장거리 전화와 국제전화를 40∼ 50% 싼 요금에 사용할 수 있게 돼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며 “올 추석에는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도 인터넷 폰과 PC용 웹카메라를 마련해드려 화상 전화통화를 시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인터넷 폰과 PC용 웹카메라는 원격진료 원격교육 등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이 아파트 정보문화관과 노인정에는 웹닥(Webdoc)이라는 인터넷 건강측정기가 시범적으로 설치돼 있다. 이 장비를 사용하면 누구나 혈압 혈당 체지방 등을 스스로 측정할 수 있다. 또 측정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병원 등으로 전송할 수도 있다. 앞으로 인근병원과의 네트워크만 구성된다면 일상적인 진찰이 필요한 주민들은 개별적으로 웹닥이란 장비를 갖추고 인터넷 폰과 웹카메라를 이용해 의사로부터 원격진료를 받을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인터넷의 기술적인 혜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터넷을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흔히 아파트에서는 이웃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 아파트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소식의 전달이 마치 옛날 시골마을의 입소문 수준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르다.

●주민들 공동체의식 회복 큰 소득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소위 ‘○미용실 사건’이다. ○미용실은 단지내 상가에 있는 한 미용실이다. 주민 김모씨는 7월 4일 아파트 홈페이지 게시판에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하다가 머리가 타서 녹아내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곧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웃 주민 이모씨는 ‘이유야 어찌됐든 종업원이 잘못했으면 사업주가 책임져야 한다’는 글로 김씨를 두둔했고 박모씨는 ‘아파트 상인들의 횡포에 입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거들었다. 반면 또 다른 김모씨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것이므로 양자가 한발씩 양보해서 원만히 해결을 봐야 한다’는 신중함을 보였다. 이 논란은 일주일동안 뜨겁게 게시판을 달구다가 결국 ○미용실측이 게시판을 통해 사과를 하고 피해자 김씨가 사과를 받아들임으로써 마무리됐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게시판에는 또 다른 미용실의 불친절, 제과점 빵의 신선하지 못함, 치과병원 의사의 무뚝뚝함, 어린이집의 성의없음을 지적하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미용실이 사과를 늦추다가 신망을 크게 잃은 것을 곁에서 지켜본 업주들은 즉각 사과의 글을 올리고 개선을 다짐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사랑방 같은 아파트 네트워크

아파트 홈페이지의 활성화는 아파트 관리도 더욱 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한 주민이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재활용 쓰레기 수거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각 가정에 쓰레기 봉투 20ℓ짜리 20장을 나눠주기도 했다’는 글을 올리자 관리사무소에서는 즉각 답변을 올렸다. ‘매월 148만원의 수입이 발생해 경비원 34명에게 1인당 3만원씩 모두 102만원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돈은 재활용통장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돈은 나중에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사용될 것입니다.’

김형진 관리사무소장은 “과거에는 관리사무소에 대한 민원이 전화나 직접 대면을 통해 1 대 1로 이뤄졌지만 지금은 누구나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이 제기한 불만사항과 답변을 볼 수 있어 관리인으로서는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정보문화관은 이 아파트의 독특한 문화시설이다. 이 곳에는 주민들의 인터넷 교육장과 작은 영화관이 있다. 인터넷 교육장에는 18대의 컴퓨터가 설치돼 있어 아이들을 위한 PC방으로도 사용된다. 27석의 좌석을 갖춘 영화관은 대형극장의 스크린(가로 270㎝, 세로 180㎝)과 음향(스피커 7개, 우퍼 1개), 홈시어터의 안락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평일에는 하루 2회, 토요일 일요일에는 하루 3회씩 DVD로 출시된 영화가 상영된다. 9월에 상영되는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공공의 적’과 같은 성인 영화부터 ‘다이너소어’ ‘토이스토리 2’와 같은 아동 영화까지 다양하다.

정보문화관은 현재 아파트 건설회사의 자회사인 대림 I&S의 직원 2명이 무료로 위탁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주민공동체가 시설을 넘겨받아 돈을 주고 관리자에게 맡겨야 한다. 또 그동안 무료로 사용해온 인터넷 전용망에 대해서도 각자 월 2만∼3만원의 사용료를 내야 한다. 주민들이 정보화의 가치를 느끼고 합의하에 이런 부담을 감수할 수 있을 때에만 이곳은 비로소 자생력을 갖춘 사이버아파트가 될 것이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