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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외도’ 하려면 주주에게 먼저 물어봐

입력 | 2002-09-05 18:24:00



.‘여윳돈 활용이냐, 한눈팔기냐.’ 외환위기 이후 한국기업 사이에 가장 널리 퍼진 말 가운데 하나는 ‘선택과 집중’이었다. 문어발식 사업을 정리하고 회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역량을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몇몇 기업이 여유자금으로 골프장을 매입하는 등 ‘사업 다각화’를 시작했다. 투자자와 학계의 시선은 따갑다. “한눈팔다 줄줄이 부도가 난 외환위기의 아픈 기억을 벌써 잊었느냐”고 지적한다.

그러나 기업들도 할 말이 많다. “최고의 실적을 올려 돈은 넘치는데 딱히 재투자할 곳도 마땅찮다. 그렇다면 그 돈을 금고에 쌓아두란 말인가.”

실제 사업 다각화를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한 사례도 적지 않다. 신도리코는 외환위기 직후 하나은행에 투자해 짭짤한 수익을 올렸고 넥센타이어는 올해 부산방송을 인수한 뒤 ‘적절한 투자’라는 칭찬을 받았다.

골프장을 사면 ‘부도덕한 짓’이고 방송국이나 은행에 돈을 쏟아 부으면 잘한 투자라는 식의 기준은 있을 수 없다. 돈이 남아도는 기업들의 사업 다각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그 기준을 새로 정립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다.

▽백화점과 골프장, 따가운 시선〓지난달 6일 맥주업계의 선두주자인 하이트맥주가 골프장 ‘클럽 700’을 370억원에 사들인다고 공시했다. 반응은 증시에서 가장 빨리 나타났다.

투자자, 특히 외국인투자자들은 이날 하이트맥주 주식을 내다팔았다. 내수 우량주에 탄탄한 실적을 자랑하던 이 회사 주가는 6일 장중에 하한가까지 밀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14%나 폭락했다.

지난달 22일에는 롯데칠성과 롯데제과의 사업 다각화가 도마에 올랐다. 두 회사가 각각 108억원씩 러시아에 백화점을 짓는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공시를 한 게 발단이었다. 이 백화점은 롯데가 그룹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

그동안 두 회사에 대해 굳건한 신뢰를 보였던 외국인투자자들의 실망 매물이 쏟아졌다. 이날 롯데칠성 주가는 14%, 롯데제과 주가는 11% 폭락했다. 백화점과 아무 상관없는 롯데삼강 주가도 3% 동반하락했다.

JP모건증권은 다음날 공식적으로 “롯데칠성과 롯데제과가 유동성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공격했다. 두 회사가 그룹의 이익을 위해 이런 식으로 돈을 쓴다면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기준이 뭔가〓하지만 사업 다각화를 잘해 칭찬 받은 기업도 있다. 지난해말 부산방송 인수를 결정한 넥센타이어는 인수 결정 후 주가가 오히려 올랐다. 전문가들도 “저평가된 부산방송을 적절한 가격에 잘 인수했다”고 넥센타이어의 결정을 높게 평가했다.

그렇다면 다각화를 잘했다거나 못했다고 평가할 때 기준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시너지 효과’다. 주력사업 외에 다른 분야에 진출하더라도 주력·비주력 두 분야가 서로 도움을 주는 효과를 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골프장 백화점은 물론 넥센타이어의 부산방송 투자도 모두 잘못된 투자이다. 타이어 회사가 방송국을 갖고 있어봐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

두 번째 판단 기준은 ‘자금 운용의 효율성’이다. 골프장이건 방송국이건 돈만 벌어 주면 잘한 투자라는 식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런 ‘헐렁한’ 기준을 들이대면 외환위기 이후 확산된 ‘선택과 집중’의 개념은 전혀 의미가 없어진다. 골프장이건 복권사업이건 도박장이건 돈만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한국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불러왔고 결국 외환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주주에게 물어 보라〓전문가들이 꼽는 사업 다각화 평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주의 동의’다.

회사가 남는 돈으로 골프장을 살 수도 있고 방송국을 살 수도 있다. 또 이런 다각화를 잘 활용하면 여윳돈을 이용해 회사에 더 많은 부(富)를 쌓을 수 있다.

문제는 회사의 ‘남는 돈’의 주인이 바로 주주들이라는 점. 주주들이 맥주 잘 만들라고 대 준 돈으로 골프장을 사려한다면 먼저 주주들에게 허락을 받는 게 정상이라는 지적.

넥센타이어의 부산방송 투자를 전문가들이 칭찬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말 부산방송 인수를 공식 결정한 뒤 올해초 상장기업 가운데 가장 빨리 주총을 개최했다. 그리고 부산방송 인수 건에 대해 주주들과 3시간 가까이 허심탄회하게 토론했고 결국 허락을 받았다.

반면 하이트맥주 롯데칠성 롯데제과는 이런 과정이 없었다. ‘회사 주인은 주주’라는 근본적인 생각이 부족한 탓이다. 실제 이들 회사는 증시에서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관심이 크지 않은 회사로 평가받는다. 3개 회사 모두 현금을 2000억∼4000억원씩 갖고 있으면서 시가 배당률은 0.01%에 못 미칠 정도로 배당에는 관심이 없다.

가치투자자문 박정구 사장은 “기업이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꼭 사업 다각화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경영진이 주주들에게 새로운 투자에 대해 허락을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3개 회사 당좌자산 및 투자금액, 배당 비교

회사당좌자산투자내용투자금액지난해배당금시가배당률롯데칠성2046억원모스크바 롯데타운108억원 20억원 0.0022롯데제과3226억원〃108억원 21억원 0.0024하이트맥주3889억원골프장 클럽700370억원174억원 0.0133시가배당률은 지난해 배당금을 올해 8월말 주가 기준으로 환산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