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회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맹자’를 들추다 한 구절에 눈이 멈추었다.
“덕망과 지혜, 기술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란 언제나 병든 자에게나 있다. 버림받은 신하와 천대받는 자식만이 마음가짐이 바르고 환난에 대한 염려가 깊기 때문에 목표에 도달한다.”
그 동안 수십 번 ‘맹자’를 읽었지만 이 구절은 한번도 내 마음에 남지 않고 그대로 여과되었다. 건강과 복록을 누리는 자가 아닌 병든 자, 버림받은 자가 사회와 삶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 맹자의 말이 새삼 의미를 갖고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나는 맹자의 이 말을 17·18세기의 교체기를 살다간 한 장애인 독서광의 사연에 그대로 적용하고 싶다.
남극관(南克寬·1689∼1714). 생전에 겨우 26세를 산 사람으로 그 이름을 아는 자 드물다. 숙종조의 명재상 남구만(南九萬)의 맏손자라는 점을 말하면 그 위치가 조금 알 듯하다. 대갓집의 맏손자이므로 온갖 복록을 누렸을 것 같지만 그는 6년 이상 각기병을 앓다 요절한 사람이었다. 26세를 산 그의 삶을 음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독서광이었다. 문밖 출입을 하지 못한 그가 할 일은 책을 읽는 것 뿐이었다. 그는 당시 책주름(서적중개상)을 아홉 번이나 바꿔 가면서 수많은 책을 구해 읽었다. 나중에는 기질(奇疾)에다 독서로 인한 안질까지 겹쳐졌다. 할아버지 남구만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을 많이 보아 눈이 상했다고 손자의 안질을 걱정하기도 했다.
남구만은 죽으면서 손자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초상에 참석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병든 손자가 자기 초상에 참석하여 죽음을 재촉할까봐 염려해서였다. 그 만큼 남극관은 죽음으로 가면서도 책을 놓지 못했다. 남극관은 죽기 바로 1년 전, 제어할 수 없는 광적 독서에 스스로도 지쳤는지 여름이 막 가고 가을이 시작하는 첫 날 한 가지 일을 시도하였다. 눈병과 심장병으로 고통받던 그는 한달 동안 책을 읽지 말자고 다짐하고 날마다 있었던 일을 일기로 쓰기 시작했다. 한 달이라는 시한을 두고 쓴 ‘단거일기(端居日記)’라는 이름의 일기는 이렇게 해서 쓰여졌다.
솟구치는 착상과 보고싶은 서책을 버릴 수 없는 자신을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광적 독서벽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30일을 헤아려 보니 책을 접하지 않아 ‘무사(無事)’라고 쓴 날은 겨우 5일이요 나머지는 모두 독서일기였다. ‘무사’를 바랐던 그는 일기를 이렇게 맺었다. “사람이 조바심을 내기를 좋아하고 정적을 참지 못하는 것이 정말 이렇구나. 저 명리(名利)에 날뛰는 자들은 또 어떻게 고치나?”
독서가 죽음을 재촉하여 결국 그는 이듬해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눈여겨볼 것은 그 독서 일기의 내용이다. 젊은 학자의 소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당돌한 논설이 곳곳에 담겨있다.학계와 문단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의 주장을 그는 좌충우돌 뒤집어버렸다. 이이(李珥)도 김창협(金昌協)도 그 표적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반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윤춘년(尹春年)의 학설을 서슴없이 인정하였고, 또 우리 고전에 깊은 관심을 보여, “‘파한집(破閑集)’은 문사가 고아하고 깨끗하여 사랑스럽다” “‘고려사’는 서술이 고아하고 질박하며 서사가 소상하여 중국의 송원시대 역사보다 낫다”라고 하였다.뿐만 아니라 그는 한글에 관한 분석까지도 시도하고 있다. 당시 독서계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은 그런 주장은 다른 학자의 생각 속에서 찾기가 어렵다. 요즘 나이로는 학자 지망생에 불과했을 사람의 주장으로서는 너무도 자신에 차 있다. 그의 사후 문집이 나왔을 때 비난이 비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집을 1책으로 편집하여 ‘몽예집(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