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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규민]´바보들의 샤워´

입력 | 2002-09-06 18:32:00


‘바보들의 샤워’라는 조어가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한 말이다. 바보는 처음 샤워꼭지를 틀었을 때 찬물이 나오면 레버를 뜨거운 쪽으로 홱 돌렸다가 뜨거운 물이 쏟아지면 이번에는 꼭지를 다시 찬물 쪽으로 돌리는 일을 반복해 끝내 제 온도의 물로 샤워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는 정부의 경제정책가들이 바로 이런 식의 샤워를 하는 바보들이라고 비꼬았다.

어느 나라 경제관리들이나 다 그렇기에 이 말이 나왔을 텐데 그걸 모를 리 없는 외국 언론들이 요즘 유난히 우리나라만 예로 들면서 ‘시계추 정부’라고 비꼬는 이유는 무엇인가. 냉탕 온탕을 반복하는 정책 때문에 한국 경제는 중심을 잃고 국민의 가슴에는 멍만 든다는 것이 보도내용들이다.

▼집값에 불지른 DJ노믹스▼

실제로 우리 경제정책에서 ‘바보들의 샤워’는 일상화된 느낌이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이 핀잔과 가장 절묘하게 궤를 같이 한다. 불과 2년반 전, 건설교통부는 “1년 이내에 확실하게 부동산 경기를 띄우겠다”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다. 이미 98년부터 시작된 부양책으로 집값이 폭발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정부가 왜 ‘주마가편(走馬加鞭)’식 정책을 선택했을까.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순수하지 못한 정부의 검은 속내를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99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졸업했다’며 청와대에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파티를 벌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잔칫상도 치우기 전에 국내경기가 내리막에 들어서자 정부는 대단히 쑥스럽게 됐다. 눈앞에 국회의원 선거까지 기다리고 있던 터라 경제관리들은 정치권의 부동산 경기부양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혼란은 여당에 국회 의석 몇 개 더 얻게 해주려는 정치적 사명감이 빚은 재앙인 것이다.

정부가 나서면 확실하게 불이 번지는 게 부동산 경기다. 하지만 그 해악이 워낙 크고 무섭기 때문에 현명한 정부라면 웬만해서는 그런 짓을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온통 반대의 목소리를 거스르면서 그때 정부가 쏟아낸 12개의 크고 작은 정책들은 부동산 경기를 점화시키는 ‘소리 없는 번갯불’이 되어 그해 연말 서울 강남의 부동산에 화력 좋은 불을 질러 버렸다.

당황한 정부가 그 뒤 쏟아낸 냉탕식 정책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아직까지는 산불난 데 수도 호스 디밀기 정도다. 분양가 자율화를 취소하겠다고 엄포나 놓는 건교부 장관의 구식 행정, 구태의 자금출처 조사에 매달린 국세청, 그리고 뒤늦게 충성 대열에 뛰어들어 느닷없이 아파트 주부회를 대상으로 담합조사에 나선 공정거래위원회는 ‘샤워실의 바보’ 행렬에 동참한 존재들이다.

진화를 위해 엊그제 메가톤급 물폭탄까지 등장했지만 이 정권이 지른 불은 당대에 끄지 못할 공산이 크다. 오히려 이번에 퍼부은 그 많은 물이 다시 얼어붙을 때쯤 우리 경제가 더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 하나 추가한 꼴이다. 자고 나면 수억원씩 올라 넉넉해진 집주인에게 목이 매인 셋방살이 가장의 상대적 박탈감을, 그리고 강남 아파트값의 폭등을 지켜보는 여타 지역 주택 소유자들의 상대적 빈곤감을 이 정부는 불을 지르기 전에 과연 단 한번이라도 염두에 두었을까.

결국 ‘국민의 정부’는 실책을 통해 아파트를 갖고 있는 ‘강남 국민’을 집권기간 중 최대의 수혜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고 혜택의 주인공들이 정권에 대해 상응하는 고마움을 느낄까. 실책을 놓치지 않고 부익부를 실현할 만큼 똑똑한 그들이 과연 이런 수준의 정부 여당에 얼마나 많은 표로 보은하겠는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덜 가진 계층의 분노한 마음이 정권을 표로 심판할 가능성만 더 높아졌을 뿐이다.

▼´강남 국민´들 최대 수혜자▼

정부가 강남의 투기세력에 당했다고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민주주의 경제이론의 대가라는 앤서니 다운즈는 ‘경제인은 물론 정치가 행정가 누구를 막론하고 국익보다는 사리 중심으로 행동하는 게 본성’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애국심보다 사심에 따라 사는 존재들이라는 전제 아래 정책을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재의 기회를 도덕심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정부는 탐욕을 제어할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정책을 내놓았어야 했다. 하물며 정부가 부동산 경기를 띄워 주는 멍석까지 깔아주고 이제 와서 그들의 부도덕성을 탓하는 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가진 자들만 더욱 풍요롭게 해준 채 ‘서민의 정권’은 막을 내리고 있다. 집값 폭등의 부작용으로 다음 정권은 외환위기를 선물로 받았던 이 정권보다 더 속으로 골병든 경제상태를 인계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샤워실의 바보’들이 실책을 더 저지를 수 있는 기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