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극 전개와 공중에 매달린듯한 무대가 실험적인 러시아 연극 [검은수사].사진제공 LG 아트센터
연극의 시제는 영원한 현재다. 과거의 역사를 다룰 때조차 그것이 ‘지금, 여기서, 처음’일어나는 것처럼 꾸민다. 관객들도 기꺼이 속아준다. 그러나 소설의 시제는 과거다. 새로운 실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은 근본적으로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런데 최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린 모스크바 ‘젊은 관객을 위한 극단’의 ‘검은 수사’는 이 개념을 파괴했다.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을 카마 긴카스가 각색하고 연출한 이 공연은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소설텍스트를 연극텍스트로 만든 방법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극은 천재학자 코브린이 평범한 농장의 딸 타냐와 결혼하여 불행해지는 이야기다. 철학적 사유의 환각에서 검은 수사를 만나는 남편을 아내는 미쳤다고 단정하고 우유를 엄청나게 먹이며 그를 정상인의 세계로 끌어내리려 하는데 이 부부관계가 순탄할 리 없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의 결합이 파국에 이른다. 학자는 혼자된 뒤 비로소 검은 수사를 다시 만나 고독하지만 행복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다.
연출자 긴카스의 위대한 선택은 소설의 시제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행동들을 과거시제로 묘사하고 해설했으며 대화의 장면에선 연극처럼 현재시제를 사용했다. 배우들은 대화할 때나 자신에 대해 해설할 때 똑같이 감정을 충만하게 투입했다. 그리고 상대의 해설에 대해서도 대화할 때와 똑같이 정서적으로 반응했다. 이런 고안을 통해서 긴카스는 무대 위의 소통을 과거와 과거, 과거와 현재, 현재와 현재 등 다양한 층위로 확대하여 우리의 삶에서 과거와 현재, 의식과 직관, 현실과 환상 사이의 벽을 허물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우리의 읽기에 한 차원을 더 보탰다. 과거적 소설과 현재적 드라마의 행복한 결혼으로 새로운 종의 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긴카스의 공간디자인 또한 인상적이었다. LG 아트센터의 2층 객석에 무대와 객석을 따로 마련하고 나머지 극장 전체를 배경화한 것인데, 공중에 매달린 듯한 객석과 무대는 마치 칠흑 같은 어둠에 쌓인 높은 산의 중턱쯤으로 느껴졌다. 불확실성, 신비함, 두려움, 소외, 고독, 위험 등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하는 모든 것들이 광활한 배경을 이루며 왜소한 무대와 객석을 위협하고 에워쌌다. 이 예술지상주의의 무대 위에서 세르게이 마코베츠키(코브린), 이고르 야술로비치(검은 수사), 율리아 스베자코바(타냐), 블라디미르 카시퍼(타냐의 아버지 역) 등 네 명의 훌륭한 배우들은 러시아의 위대한 연기전통에 따라 등장인물의 성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체홉의 신비하고 서정적인 작품을 잘 섬겨줬다.
‘검은 수사’는 소설과 연극의 장벽을 허물어 철학보다 깊고 내일보다 더 현대적인 연극을 이룩했다.
김윤철 (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