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택배업계 ‘빅3’의 하나인 대한통운이 배달하는 ‘추석 선물’ 가운데 서울 강남, 서초, 송파구 등 강남지역과 경기 성남시 분당으로 가는 물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 1999년 추석 때는 전체 물량의 12%였으나 2000년에는 13%, 지난해는 15%로 높아졌다. 대한통운측은 올 추석에도 이런 추세는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비교적 비싼 가격의 선물세트를 내놓던 고급 백화점들이 이번 추석에는 ‘전례 없이’ 저가(低價)형도 내놓는 등 상품가격과 종류를 다양화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 와중에도 각 기업체의 윤리경영 선포와 태풍 피해로 인해 자숙하는 분위기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선물 시즌’인 추석을 앞두고 ‘선물 문화’의 변화를 짚어봤다.
▽두드러지는 선물의 양극화〓받는 이는 더 받고, 받지 못하는 이는 계속 받지 못하는 선물의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더 깊어지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강남, 서초, 송파구 등 강남권 3개구와 동작구에 배달된 추석 선물이 전체 물량의 36.1%나 됐다. 인구 비율로 따졌을 때 이른바 강남지역에 대한 선물의 집중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한진택배는 평소 강남권과 분당 등 부유층이 비교적 많이 몰려 사는 지역에 배달되는 택배물량이 전체의 5% 수준이었으나 최근 추석 시즌이 되면서 10%를 웃돌고 있다고 밝혔다. 특정 지역으로의 선물 집중현상은 추석 1주일 전부터는 더 뚜렷해질 것으로 택배업계는 보고 있다.
소비의 양극화가 선물에도 이어지면서 선물세트의 가격 차이도 커지는 추세다.
현대백화점은 올 설까지 17만∼50만원의 정육세트 14종을 팔았다. 하지만 이번 추석부터 10만원대의 정육 선물세트 등 모두 20종을 내놓았다. 이 백화점 관계자는 “지난번에 싼 물건을 찾는 이들이 많아 이번에 저가 정육세트를 내놓았다”면서도 “하지만 40만원 이상의 고가 정육세트도 지난해보다 더 준비했다”고 말했다.
백화점 매장에 3만∼5만원대의 싼 선물세트가 새로 등장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마리당 400원 꼴인 40만 원짜리 멸치세트나 250만원짜리 한과세트 등 최고급 선물세트도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상품권의 초강세 속에 다양해지는 선물세트〓90년대 후반부터 상품권이 추석 선물의 대명사로 급부상했고 이런 추세는 올해도 마찬가지다. 94년 상품권이 부활한 지 불과 10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대부분 유통업체에서 추석 선물의 절반이 상품권 형태로 팔리고 있다.
지난해 추석 열흘 전에 첫 상품권을 발행한 홈플러스는 당시 전체 추석 선물물량 가운데 12%를 상품권이 차지했다. 올해는 추석선물 가운데 30% 이상이 상품권으로 나갈 것으로 예상한다. 롯데백화점도 98년 추석선물 물량의 64%이던 상품권 선물세트가 올해는 75%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유통업체의 한 관계자는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현물을 가져가면 상품권으로 바꿔달라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면서 “노골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태를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또 살아있는 해산물, 혼합세트 등 과거 볼 수 없는 선물세트도 인기다. 신세계와 LG백화점 등은 주문이 들어오면 바닷가재, 대게, 전복 등을 얼음에 채워 산 채로 배달한다. 현대백화점은 옥돔 2마리, 대하 6마리, 갈치 1마리 등으로 구성된 ‘혼합 생선세트’를 이번에 선보였다.
▽“선물 안 받겠습니다”〓최근 새로 눈에 띄는 현상 중 하나는 선물을 안 받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 이 경우 상당수가 30만원 이상의 선물세트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귀띔했다.
30여 년 동안 추석선물을 배달해온 신세계 드림 익스프레스 송주권(宋朱權) 본부장은 “요즘은 자발적으로 선물을 안 받겠다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면서 “태풍과 수해로 분위기가 침체된 데다 각 기업의 잇따른 윤리경영 선포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분석했다.
10여 년 전 사정(司正)기관의 내사설 등으로 ‘타의로’ 선물을 받지 않은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A백화점의 배송담당 직원은 “몇 년 전만 해도 하루 250통의 주소 확인 전화를 해도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이 1, 2명 정도였으나 올해는 4, 5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申鉉岩) 수석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커져 불투명한 선물을 배척하려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면서 “금액이나 편리성보다 ‘정성’이 담긴 선물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숙명여대 문정숙(文貞淑·소비자경제학) 교수는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탓에 비싼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보내는 사람도 꺼림칙하고 받는 사람도 무시 받는 풍토가 문제였는데 최근 일부 긍정적인 변화는 환영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