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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8월의 저편 122…백일 잔치 (7)

입력 | 2002-09-11 18:24:00


여자는 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천장을 탕 속에서 올려다보았다. 알전구. 손을 뻗으면 앉은 채로도 전구를 빼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밑을 보니, 욕조 속 자기 무릎에도 손이 닿지 않을 것 같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깨진 게 아니고 절약하는 거다. 전구 값도 무시할 수 없다 아이가. 아직 저녁이니까 안 켜도 괜찮다”

귀기울이지 않아도 남탕에서 오가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남탕과 여탕 사이에는 소나무 판자가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효길 할배는 김원봉이 표충사에 틀어박혀 있을 때, 얘기해 본 적 있다고 하더라.

표충사에 있었던 건 열서너 살 때 아이가?

‘손자’하고 ‘오자’를 열심히 읽으면서, 읽다가 피곤해지면 동네 아이들 모아놓고 둘로 갈라서 돌싸움 시켰다 카더라.

김원봉은 아이들 중에서도 원캉 뛰어났다. 한 겨울에 감천에 가서 얼음 깨고 냉수욕하고 종남산에 올라가는 게 일과였다. 매일 아침 종남산 꼭대기에서, 대한독립만세! 하고 외치니까 우리가 놀라서 하지 말라고 쫓아가면, 이번에는 용두산에서, 대한독립만세! 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래서 또 헉헉거리고 올라가면 이번에는 산성산에서 대한독립만세!

쉿! 목소리가 크다.

아이고, 여기는 일본 사람 하나도 없다.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들하고 목욕 같이 안 한다, 다들 집에 목욕탕도 안 있나.

그래도, 누가 밀고하면 어쩌겠노.

이 중에서 누가 밀고하겠노, 박가, 금가, 최 아저씨, 운남이, 우철이하고 우철이 아버지, 신덕, 다들 아는 얼굴 아이가.

대한독립만세!

그만해라, 그만해.

여자는 탕에서 나와 딸 옆에 앉았다. 두근, 두근, 거울, 아무 것도 비쳐 있지 않다, 새하얗다, 손바닥으로 문질러도, 두근, 두근, 새하얀 채, 머리 속까지 김이 파고 들었나? 아니, 몸이 뜨거워졌을 뿐, 잠시 눈을 감자, 잠시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어머니, 머리는?”

“머리는 안 감는다. 머리 감을 때는 5전 더 내야 한다”

“감아도 잘 모른다”

“가끔가다 둘러보러 온다. 그리고 나갈 때 머리 젖어 있으면 들킨다 아이가?”

글 유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