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다닌 재벌 직장에서 갑자기 물러나게 된 친구가 전화를 했다. “한 사흘 머리 식힐 책 없어?” 하고. 미국식 경영이라며 “1등! 1등!” 소리치고 “액션! 액션!”하며 내달린 이 친구에게 “그래, 이제 너야말로 천천히 살아도 좋지” 하고 소설을 두 권 읽어보라고 했다.이문열의 ‘시인’(아침나라·2001)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1999).
그러자 이 친구가 “이 가을에 ‘참을 수 없는…’같은 그런 책을 읽으라구?” 한다. 안 읽었지만 동유럽 사회주의 사회의 절망을 다룬 책 아니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 지나간 것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질문 가운데 ‘이 가을’ 운운하는 대목이 무엇인가 특별한 계기를 상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 것이다. 테러다 전쟁이다 하면서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닌 것이 지금 이 가을이다. 거기에 태풍 루사가 퍼붓고 간 엄청난 우리 수난(水難)과 정치난은 어떤가. 이 난리 속에 백수 피난민더러 “절망을 읽으라!”고 한 꼴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런 문학적 원론 이야기를 하게 되고 말았다.
“좋은 문학은 좋은 질문이다. 절망은 희망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가는 묻는다. 내 주인공은 이런 문제를 이렇게 살았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았겠소.”
나흘이 지나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는 “쿤데라식 세계 해석은 행동 불가능하다는 이런 이야기야. 우연은 필연이다, 그러니 반항이다 변신이다 행동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하고 물었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공 토마스가 테레사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떠올랐다. 테레사가 사는 마을에 우연히 병이 나돈다. 토마스의 병원 과장이 우연히 아프게 되고 토마스가 우연히 대신 가게 된다. 그 마을에서 우연히 시간이 남고 우연히 어떤 바(bar)에 가게 된다. 테레사가 우연히 그 바의 토마스 테이블 담당이었다. 토마스는 이렇게 우연이 연속적으로 여섯 번이나 일어났다(고 느낀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밑줄에 이렇게 써 넣었었다. ‘절망은 우연을 기적으로 만든다.’
친구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니까, 행동 중지의 이야기, 즉 뻔한 유럽식 결정론 아닌가?”
“유럽식? 그게 무언데?”
“찰스 핸디라는 영국학자가 말하더라. ‘The Age of Unreason’ 읽어 봐. 유럽사람은 무슨 일만 생기면 ‘잠깐만!’하고 옛날 이야기를 꺼낸다는 거야, 판단 중지를, 행동 중지를 먼저 내 놓는다는 거지. 이에 비해 미국사람은 어떻게 하자는 행동 문제를 먼저 내놓고 말이야. 다그놈의 역사 때문일 거야. 유럽은 길고 질긴 그것에 묶여서 앞으로 선뜻 잘 못 가지 못하고 그래서 변화가 느린 거지. 미국은? 역사, 과거, 이런 의식 없지. 그래서 혼자라도 먼저 앞으로! 하는 것이고.”
내 친구의 지적은 옳은 것 같다. 유럽은 혁명이다 전쟁이다 하면서 죽다가 산 경험이 많다. 천천히 가자고 하게 된다. 9.11에 대한 태도를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테러리스트는 그리고 이것과 뒤섞인 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가 없다. 무시간(無時間)적이고 행동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니 미국처럼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그만 꽈당! 꽈당! 부딪히고.
그렇다면, 자, 이 난리를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불안과 긴장의 끝에서 반만년 우리는 무슨 제안이 있는가. 우연한 위복(爲福)이라도 바라는 것 말고.
친구는 말했다. “행동이냐 중지냐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어. 지금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의 시대야.”
나는 친구에게 따지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물었다. “테레사라는 인물이 싫었어?”
친구는 금방 “아니” 한다.
그렇다. 다 절망했던 토마스에게도 테레사라는 우연한 기적이 있었다. 독자여러분들이여, 내가 친구에게 이런 말로 전화를 마친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우연이여, 우리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박의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