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가의 자존심이 독일의 저작권법을 고개 숙이게 했을까?
최근 최인훈의 ‘광장’ 독일어판이 출간됐다. 이 독일어판이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7년. 통상적으로 번역에 1∼2년 정도 소요된 뒤 출판사가 결정되는 대로 현지에서 바로 출판되는 관행에 비춰볼 때 꽤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광장’은 1995년에 대산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한국문학번역지원사업(독일어 부문)의 대상 작품으로 선정됐다. 제주대 김희열 교수와 독일인 랄프 도이치가 2년에 걸쳐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1997년 출판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독일 저작권법 중 ‘타이틀 보호법’에 부딪히고 만 것. ‘타이틀 보호법’은 같은 제목을 가진 저작물이 둘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법. ‘광장’이라는 뜻의 독일어 ‘데어 플라츠(Der Platz)’라는 제목의 책이 이미 나와 있었다.
번역 작업과 관련된 실무자들은 내용에 맞게 제목을 바꿔 출판하자며 작가에게 ‘남쪽에는 광장이 없다’라는 제목을 제안했다. 당시 최씨는 “독일에 그런 법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독일 저작권법이 바뀌어야 한다. 나는 제목을 바꿀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그는 “혹 한국에 그런 법제가 있어, 괴테의 ‘파우스트’가 ‘고민하는 이성’과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광장’이라는 작품의 동일성을 유지해야한다. 절대로 제목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역자와 실무자들이 고민 끝에, “‘데어 플라츠’라는 제목 뒤에 한글이나 한자, 또는 로마자로 괄호 안에 ‘광장’이라고 쓰자”고 작가에게 제안했으나 그는 이 역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며 거절했다.
이 문제를 3년이 넘게 끌어오다, 처음 계약했던 출판사는 끝내 책을 포기했고 새로운 출판사가 나타났다. ‘광장’이 사장(死藏)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출판사는 같은 제목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 여러 차례 양해를 구한 끝에 최인훈의 ‘데어 플라츠’가 독일에서 탄생하게 됐다.
최인훈씨는 18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작품의 제목이란 곧 작품의 내용이기도 하다. 번역 작업을 할 때도 한국인과 한국 예술의 품위, 상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야 그 의미가 있다. 제목을 바꿔서 출판하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말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