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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심규선/'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라

입력 | 2002-09-22 18:25:00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주범 김현희(金賢姬)가 ‘이은혜’라는 일본인으로부터 일본말을 배웠다고 증언한 이후 일본에서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의혹’이라는 관용구가 생겨났다. 동시에 금기도 생기고 논쟁도 벌어졌다.

금기는 ‘납치’라는 말의 사용을 꺼리게 된 것이다. ‘납치’라는 말만 쓰면 북한이 화를 내거나 회담장을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리나 외상까지도 ‘인도 문제’라는 말을 써왔다. 북한이 ‘무서워’ 눈 가리고 아옹한 것이다.

논쟁은 소위 ‘입구론’과 ‘출구론’이 맞선 것이다. 납치문제를 먼저 해결한 뒤에 수교교섭에 나서야 한다는 강경론이 ‘입구론’이다. 그래서는 회담 자체가 안될 테니 수교교섭을 하면서 납치문제도 논의하자는 온건론이 ‘출구론’이다. 논쟁은 평행선을 그어왔다.

일본 속담에 ‘이웃집 잔디밭이 더 파랗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과 같다. 일본은 2000년 6·15선언 이후 급진전하는 남북관계를 지켜보며 남북의 푸른 잔디밭을 부러워해 온 것이 사실이다. 북-미관계까지 개선될 때는 소외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17일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북-일 정상회담은 일본측에서 보면 북한에 대한 부당한 금기를 일거에 깨버리면서 강경론인‘입구론’이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북한이 어느 때보다도 일본의 ‘돈’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절묘한 타이밍의 덕을 봤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유는 “납치문제 해결 없이는 수교도 없다”고 배수의 진을 친 정치지도자들의 일관된 입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일본의 버티기에 북한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한 수 지도를 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는 우리가 일본에서 배워야 할 차례다.

우리 정부도 북측에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제안해야 한다. 북한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이 없다. 이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일본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우리는 이미 북한에 많은 것을 베풀었고, 앞으로도 많은 것을 베풀려고 한다. 논의를 거부하면 설득해야 하고, 설득해도 안 된다면 그 부당성을 아프게 지적해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잘못 건드려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일을 걱정할 정도라면 솔직하게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은 실패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낫다. 남북화해의 큰 틀을 짜야 한다며, 남북관계를 본궤도에 올리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며 우리는 그동안 많은 양보를 해 왔다. 그 중에는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도 들어 있다. 이제는 당연히 그들 가족의 눈물도 닦아줄 때가 왔다.

피랍 일본인 중 8명이나 숨졌다는 소식에 일본인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는 오히려 10%포인트나 올라갔고, 81%가 북-일 정상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비록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운 결과가 나왔지만 국민은 고이즈미 총리가 정치적인 타협을 하지 않고, 국민의 편에 서서 대북 접근에 나섰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남북협상에서는 한 수 위라고 생각해온 우리 정부가 한 수 아래로 보아온 일본에서 배워야 할 대목이다.

심규선 정치부장 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