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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게 이렇군요]대선정국과 돈의 함수

입력 | 2002-09-23 18:53:00

중앙당사의 청소 설비 용역을 맡고 있는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하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왼쪽) - 서영수기자


지난해 10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기 직전, 민주당 A 최고위원은 사석에서 DJ를 격한 어조로 비난했다.

“DJ가 대통령돼서 당을 위해 뭘 했나. 돈을 모아줬느냐, 당에 힘을 실어줬느냐. 명색이 최고위원인 데 청와대에 불러 농산물 상품권 30만원어치를 주더라. 당과 정권이 개판이 된 건 돈이 없어 그런 것 아니냐. 총재는 무슨 놈의 총재냐.”

이달 초 반노(反盧)파에 속하는 민주당 B 의원의 의원회관 사무실에 한 원외지구당 위원장이 찾아와 탈당을 종용했다.

그러나 B의원은 “이 사람아, 신당을 아무나 만드나. 돈이 있어야 만들지. 신당만드는데 얼마가 드는지 아는가. 최소 200억원이네”라며 탈당종용을 일축했다.

16일 비노(非盧) 진영의 C 의원도 기자들에게 ‘돈’과 관련된 절실한 입장을 털어놓았다.

“노무현(盧武鉉)이가 후보가 됐으면 돈을 만들어야지. 자기는 깨끗한 척 가만히 있으면 누가 흙탕물에 손을 대나. 난 노무현이 한테 설렁탕 한 그릇 얻어 먹은 적이 없다.정몽준(鄭夢準)이는 그래도 돈이라도 있지 않나.”

선대위 발족식 행사계획 등을 논의하고 있는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왼쪽) - 박경모기자

돈과 정치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실제로 정치권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 이상이다. 때문에 정가에서는 ‘명분은 이상이요 돈은 현실이다’는 자조적인 얘기마저 나돌고 있다. 최근 민주당내의 반노 진영이 탈당을 벼르면서도 결행을 망설이는 것은 신당창당자금에 대한 고민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있게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외환위기 이후 정치권의 최대 돈줄이었던 기업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고 회계제도의 투명성이 강화되면서 정치권내 ‘검은 돈’의 흐름이 현저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돈에 의지하는 관행은 여전해 돈줄이 메말라 돈의 지배력이 더 커지는 역설적인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다.

한나라당내에서 소속 의원들이 당에 납부하는 후원금 납부액 순위는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에게 직보되는 ‘1급 기밀’에 속한다. 의원들의 후원금 성적표는 의원 개개인의 ‘충성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고 있다. 자연히 자금동원력을 인정받는 당내 인사가 핵심 요직에 발탁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당직개편에서 핵심 당직에 발탁된 D 의원은 후원금 모금액 1위를 기록해 눈길을 끌었다. 또 주진우(朱鎭旴) 김무성(金武星) 전 비서실장, 김진재(金鎭載) 선대위 직능특위위원장 등 재력을 갖춘 인사들이 이 후보의 주위를 지켜왔다.

당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이 이 후보의 핵심측근이었던 윤여준(尹汝雋) 의원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사실상 우리 당의 자금줄 차단의 목적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민주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김원길(金元吉) 박상규(朴尙奎) 의원이 당의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을 맡았던 것도 두 사람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재계에서 후원금을 끌어올 수 있는 당내 몇 안되는 인물이라는 점이 감안됐다는 후문이다. 김 의원은 서울대 상대를 나와 대한전선 부사장을 역임하는 등 재계에 발이 넓고,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 출신인 박 의원 역시 기업계에서는 ‘마당발’로 통한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탈당불사’를 외치며 신당창당을 주도하고 있다. 당내에서 이들의 파괴력을 높게 보는 이유는 신당창당에 필요한 거액의 정치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한노인회를 방문한 무소속 정몽준 의원(오른쪽)

현재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보군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한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전례없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정 의원은 ‘원내중심’‘자원봉사자 중심’의 선거전략을 세우고, 자신의 현대중공업 주식을 금융기관에 신탁, 선거자금과 사재(私財)를 원천분리할 방침이다.

캠프 핵심요원이 개인적으로 지급받는 돈은 교통비와 식대 명목의 최소한의 급여 뿐이며, 극소수 핵심 측근들도 카드지출 한도가 월 100만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캠프 내에서는 자금부족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 서소문에 문을 연 캠프 사무실(323평)만 해도 보증금 2억2600만원에 매달 임대비 및 관리비를 합쳐 3550만원씩 들어가는 실정. 국민일보 빌딩 사무실은 보증금 3억원에 월 임대비 및 관리비가 4000만원 가량 든다. 현재까지는 정 의원의 개인 돈으로 충당했지만 앞으로 신당 창당에 최소 100억∼200억원은 들어가고, 대선을 치르는데 따른 최소한의 조직가동비가 추가로 200억은 소요될 것이라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문제는 정 의원이 자신을 위해 몰려든 정치인 및 지지자들의 ‘기대심리’를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점이다. 정 의원의 ‘짠돌이’ 행보가 계속될 경우 자칫하면 ‘돈의 프리미엄’을 기대하고 몰려든 지지세력내부의 분란을 촉발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에서는 요즘 당의 빚이 얼마냐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노 후보측의 한 핵심 의원은 “당의 재정 중 206억원이 비어 있는 데, 이에 대한 영수증 처리도 제대로 돼있지 않다더라”며 분개했다.

하지만 당직자들은 “지금 당의 빚은 40억원 미만”이라고 일축한다. 한때 당의 빚이 심각한 수준까지 불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당 재정을 긴축 운영하면서 악성부채는 대부분 해결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노 후보가 ‘선대위 따로, 당지도부 따로’라는 2원 체제를 수용한 이면에는 당이 안고 있는 복잡한 재정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최근 모 그룹계열사가 공식적으로 이사회 결의를 거쳐 중앙당 후원회에 2억원을 헌금하는 등 ‘대세론’이 다시 확산되면서 돈 사정도 호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원 여부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실제 97년 대선 당시에도 대기업들은 막판까지 관망세를 취하다가 선거일 7,8일전 직접 유력한 후보를 상대로 ‘베팅’을 했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