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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보니]장제국/일본인 피랍쇼크 이해는 하지만…

입력 | 2002-09-24 18:15:00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일본에서 ‘헨진(變人)’으로 불린다. 직역하면 ‘이상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파벌 배경도 없는 그가 강력한 개혁의지를 무기로 지난해 4월 총리에 오를 때부터 ‘파격정치’의 조짐이 시작됐다.

지난주 그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도 과히 ‘헨진’다웠다. 일본의 정상이 전격적으로 방북을 결정하고 여기에 정치생명을 걸었다. 북-미간 대립상황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강행한 것은 일본 외교관행으로 볼 때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또 의전행사를 일절 거부하고 철저히 실무방문으로 일관하며 정상회담에만 집중하고 돌아온 것도 과거 일본 정치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경우였다.

그 결과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을 줄이고 일본의 과거 청산문제도 매듭을 짓는 등 보기 드문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특히 일본의 최대 현안이었던 피랍 일본인 문제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진전된 결과를 얻어냈다.

이번 방북은 북-일 국교정상화 조기 실현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지만 재일 한국인들에게는 여러 복잡한 심정을 갖게 했다. 우선 고이즈미 총리의 ‘돌발적인’ 방북이 미국의 대북 강경파를 자극해 미일 관계에도 갈등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됐다. 그렇게 되면 이번 방북을 적극 지지해온 한국 정부에까지 불똥이 튀어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일 관계가 긴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일본 국민이 그렇게 바라던 피랍 일본인들의 안부확인이 이뤄졌는데도 불구하고 8명이 사망했다는 통보 때문에 국민여론이 날로 격앙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문과 TV 등은 연일 북한의 잔인성과 일본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비판하고 있다. 또 비난의 화살이 총련 쪽으로도 향해져 많은 총련계 재일동포들이 거의 매일 협박과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북한의 핵미사일 등 안보문제나 일본의 과거청산 등 북-일 정상회담의 성과는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북-일 회담의 성과가 빛이 바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인들 사이에는 왜 ‘살인마’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관계정상화를 해야 하느냐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물론 피랍자 8명의 사망소식에 충격받은 일본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국민 8명의 존엄한 생명을 잃었다는 분노에 취한 나머지 동북아 안정과 평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이번 북-일 정상회담의 더 큰 목표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 정부가 자칫 이런 여론에만 집착해 다음달 어렵게 재개되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싹도 트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번 방북의 성과를 북-일 관계 정상화로 이어가지 못한다면 앞으로 당분간은 고이즈미 총리의 ‘헨진’적 대북 접근은 기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북-일 정상회담의 성과는 성과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장제국 재일 미국변호사·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