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선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온 충청지역의 표심(票心)이 추석 전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 급변 추세를 보이자 각 대선후보 진영이 ‘충청 표심’을 향한 본격적인 구애에 나서고 있다.
특히 충청지역 확보 여부를 대선 승리의 결정적 고비로 보고 있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 진영과 무소속 정몽준(鄭夢準) 의원측은 자민련 의원들과 김종필(金鍾泌) 총재를 끌어들이기 위한 물밑작업에 이미 나섰다.
▽충청권을 잡아라〓추석연휴 직후인 9월25일. 서청원(徐淸源) 대표 주재로 열린 한나라당 고위선거대책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허병기(許丙基) 부소장의 자체여론조사 결과 보고를 심각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추석연휴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충청권에서 우리 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가 정 의원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뒤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보고 직후 서 대표는 “그 문제는 따로 얘기하자”며 최고위원을 제외한 여타 당직자들을 퇴장시키고 충청권 지지율 제고 방안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추석 전까지만 해도 충청권에서 정 의원에 대해 근소하게 앞서거나 비슷한 추세를 보였던 이 후보의 여론지지도가 떨어진 것은 △정 의원이 추석 직전 출마선언을 하면서 언론에 집중 노출된 데다 △‘병풍(兵風)’ 등 정치공방에 식상한 부동층이 정 의원 쪽으로 몰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한 당직자는 “충청권 민심이 아직 정 의원으로 고착된 것은 아니나, 우려할 만한 상황임에는 틀림없다는 논의가 주류를 이뤘다”고 말했다.
노무현(盧武鉉) 후보에 대한 충청지역 지지율이 10%대로 나타난 추석 후 여론조사 결과는 민주당에도 충격이었다. JP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결별하고, 이인제(李仁濟) 의원이 당내 후보경선에서 낙마한 데 따른 상실감이 충청권의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민주당의 자체 분석이다.
노 후보의 한 측근은 “영남의 한나라당 편향이 점점 심화되는 상황에서 충청권마저 상실할 경우 민주당으로서는 설 땅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노 후보가 30일 선대위 출범식에서 “집권하면 청와대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며 ‘뉴 충청플랜’을 제시하고 문석호(文錫鎬) 전용학(田溶鶴) 의원 등 충청권 출신 소장파 의원들을 특보단으로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한 것도 그런 절박감을 반영한 것이란 지적이다.
▽자민련 다시 보기〓한나라당과 정 의원측이 충청권 표심 잡기의 일환으로 고려중인 JP와의 연대 문제는 ‘다목적 카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우선 한나라당으로서는 JP를 포함한 자민련 의원 15명을 끌어안을 경우, 현재 과반에서 1석이 많은 원내 의석을 대거 확충, 정국주도권을 완전 장악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정 의원측으로서도 자민련과의 연대가 가시화할 경우 원내교섭단체에 성큼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원내 교섭단체가 되면 대선 때 각종 국고보조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정 의원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카드인 셈이다.
다만, 민주당은 노 후보의 개혁 이미지를 고려할 때 자민련과의 연대보다는 적극 공약제시를 통한 정면돌파를 생각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현재로서는 한나라당이 가장 적극적인 입장이다. 서 대표는 충청권 문제가 처음 제기된 고위선거대책회의 다음날인 26일 당내 충청권의 대표주자로 완강한 ‘반 JP’론자인 김용환(金龍煥) 선대위 공동의장을 만나 충청권 대책을 협의했다.
서 대표가 김 의장을 만난 주목적은 JP를 포함한 자민련 의원들의 영입 문제에 대한 당의 내부 입장 정리에 앞선 사전정지작업을 위한 것이었다는 후문이다.
이런 내부 논의를 통해 한나라당 지도부는 JP와의 연대는 추후 논의하더라도 우선 자민련 의원들에 대한 개별 영입작업을 본격화한다는 내부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영입대상인 자민련 의원들의 분위기는 얼마전과는 달라진 듯하다. 최근 자민련 일부 의원들을 상대로 영입접촉을 벌였던 한나라당 관계자는 “추석 전 영입의사를 밝혀온 L 의원 등을 만났으나 이들은 ‘당분간 정국 추이를 지켜보자’며 관망자세로 돌아섰더라”고 전했다.
정 의원의 충청권에서의 상승세가 거꾸로 자민련 의원들의 ‘몸값’을 끌어올려 준 셈이다. 한 자민련 의원은 “어쨌든 이번 대선에서 자민련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소속 의원 모두가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뭉치면 길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JP는 계륵(鷄肋)인가〓한나라당과 정 의원측의 움직임이 본격화하면서 이들이 JP와 본격적인 연대를 할 가능성이 있느냐의 여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정 의원과 JP가 수차례 접촉했다. 자민련 김학원(金學元) 정진석(鄭鎭碩) 의원이 양자를 중개하고 있다”는 등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
실제, 김학원 의원은 정 의원측과의 교감 여부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 중에 있다. 제3신당으로 갈 수도 있고, 정 의원과도 뜻이 맞으면 함께 할 수 있다”고 여운을 풍겼다. 김 의원은 또 그런 얘기가 개인 차원의 생각이냐는 물음에 대해 “나는 혼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해 JP의 뜻을 대변한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김 의원의 이런 적극 자세와 달리, 정작 정 의원측은 JP와의 연대가 ‘구정치의 연장선’으로 비칠 것을 우려,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 의원측의 한 관계자는 “지금 우리는 정치개혁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민련과의 연대는 그런 이미지 구축이 끝난 뒤에 생각할 문제다”고 말했다. 내부에서는 정 의원이 9월8일 JP와 부부동반 회동을 한 것이 언론에 보도돼 이미지 타격이 컸다는 비판론도 많다. JP와 정 의원을 중개한 또 다른 당사자로 거론된 정진석 의원의 말도 김학원 의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정진석 의원은 “8월10일 JP와 함께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주제로 한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정 의원을 우연히 만나 두 분과 함께 식사를 한 것 뿐이다”며 “정 의원과는 그 후 전혀 왕래가 없다. 내 입장은 사실 정 의원과는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한나라당도 JP 영입에 대해서는 아직 유보적이다. 이회창 후보의 한 특보는 “당 대선기획단이 최고위원회의 논의 결과를 토대로 27일 JP문제를 토론한 결과, 충청권에서 정 의원의 지지율 상승이 JP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많았다. 서둘러 JP를 영입할 경우 자칫 역풍이 불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과 정 의원측 모두 JP와의 연대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으되 서둘지는 않겠다는 입장인 셈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JP가 가세한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타 진영으로 가면 손해인 그런 존재 아니냐”며 “JP와의 연대 문제는 결국 10월말 11월초나 돼야 윤곽이 잡힐 것이다”고 말했다.자민련 조부영(趙富英) 부총재는 “JP와 자민련은 정 의원의 지지도 존속여부, 민주당 상황 등을 지켜본 뒤에 최종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윤승모기자 ysmo@donga.com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