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멈췄지만 그렇다고 최태원의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1014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한국의 ‘철인’ 최태원은 7년간의 긴 여정을 접고 이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신원건기자 laputa@donga.com
게임은 끝났다. 내내 벤치를 지키던 그에게 기다리던 출전 지시는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9회 말 경기 종료를 알리는 야구장의 차임벨. 그 소리는 7년간의 긴 레이스가 마침내 끝났음을 일깨워주는 신호처럼, 또는 그의 삶의 한 자락이 떨어져 나간 걸 애도하는 듯한 조종(弔鐘)으로도 들렸다. 그 소리를 타고서 좀처럼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던 그 상황에 대한 실감이 서서히 그의 몸 속으로 전달되는 듯했다. 그건 ‘비수’와도 같았지만, 그는 애써 담담해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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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쉼 없이 이어온 그 여정에 대한 별리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았다. 승리를 기뻐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간 그의 몸 속에서 참았던 게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울음이었던 것이 터무니없게도 웃음이 돼 나왔다. 그건 울음보다 더한 오열이었을 거다. 32세의 젊은이는 아마도 울기에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2002년 9월 10일 서울 잠실야구장. 95년 이후 1014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신화’를 접은 야구선수 최태원(SK)은 그렇게 힘겨운 고별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7년간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해온 이 청년. 그의 얘기는 우등생만을 좇는 세태에 그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열정과 집념으로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신화’로 읽힌다.
●땀과 열정의 기록
사실은 그도 기록의 끝을 어느 정도는 예견했다.
“그날 경기 시작 전에 제가 먼저 ‘기록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코치님께 얘기했죠. 7회 말 수비가 끝난 후 수석코치님이 오늘은 출장이 어렵겠다고 말해주더군요.”
결국 최태원은 경기에 나가지 못했다. 사실 6 대 5로 박빙의 승부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가 들어갈 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그는 몇 게임 전부터 타격 감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선발 선수로 출장하지 못하고 대타나 대주자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선수의 기록을 지켜주지 못한 감독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감독님이라고 마음이 편하셨겠어요. 그날 밤 밥 먹는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어깨를 툭툭 쳐주시더군요.”
연속경기 출전은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려한 기록은 분명 아니다. 홈런타자처럼 펜스 너머로 공을 날려보내고 그라운드를 도는 멋진 의식도 축포도 없다.
그저 달력에 하루하루 조용히 쌓여갈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 바로 이 기록의 역설이 있다. 팬들의 환호 대신 오직 땀과 열정으로 써 내려간 기록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 값진 것일 수 있다. 최태원의 기록은 이제 성년 문턱을 넘긴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그 깊이와 높이를 더해준 것이다.
1000경기 이상 연속출장은 12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겨우 6명만 해낸 것이다. 66년 역사의 일본에서도 5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1995년 4월16일 광주에서 대타자로 나간 이후 2885일(겨울 휴식기 포함) 동안 최태원이 이뤄낸 성취는 앞으로 몇 십년 동안 깨지지 않을 대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이 줄곧 단호한 확신의 여정이었던 건 아니다.
운동선수의 몸이란 일반인의 생각 이상으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언제 어떻게 부상할지, 어떤 슬럼프에 빠질지 알 수 없다. 그의 기록은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단 하루라도 내 자신을 관리하지 않으면 끝나는 기록이라 경기를 마친 뒤에도 술 한잔 마음놓고 못 마셨던 것 같습니다.”
더 큰 적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왔다.
“처음에는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신이 났죠. 하지만 햇수를 거듭하면서 내 자신에 대해 불안과 회의가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언젠가부터 매일 아침 그는 일어날 때마다 두 가지 질문에 시달렸다.
“내가 오늘도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까라는 것, 또 경기에 꼭 출전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더군요.”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고비였던 그의 도전에 힘이 돼 줬던 것은 역시 팀 동료와 팬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그가 다소 부진할 때마다 선후배들은 “너는 신경 쓰지 마라”며 응원군이 돼 줬다.
그리고 아들 준서의 눈빛이 있었다. 종전 김형석 선수의 622경기 기록을 깨고 신기록 행진을 벌이기 시작할 때 태어난 준서의 눈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쑥쑥 자라는 준서의 키와 함께 최태원은 자신의 기록을 키워왔던 셈이다.
“녀석이 아빠가 뭘 하는 사람인 줄은 대충 알지만 아직은 아빠 기록이 뭔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모른들 어때요. 그 녀석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고맙죠.”
그는 운동선수로는 작은 키다. 성경은 ‘사람은 타고난 키에서 한치도 보탤 수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말하는 그를 보니 그의 기록과 함께 커진 것이 준서의 키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이제 기록이 중단된 지 근 한 달. 연속경기 기록으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1000경기째 때 구단에서 한 미 일 철인(鐵人) 3명의 사인볼을 만들어줬어요. 미국의 칼 립켄 주니어, 일본의 기누가사 것과 함께 제 사인을 새긴 공을 두 개 만들어서 한 개는 제가 갖고 다른 한 개는 구단이 보관 중이죠.”
구단이 매우 어렵게 마련한 귀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소중함이 ‘철인’이라는 칭호에 비할 바는 못될 것이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의 ‘공식 철인’이다. 그 호칭이야말로 그의 땀으로 얻어낸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최태원의 기록은 사실 허망하게 깨진 면이 없지 않다. 1000경기 연속 출장의 대기록을 세웠던 게 지난달 23일이었다.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도 네자리 숫자의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갖게 된 것이었고, 경기 뒤에 대대적인 축하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한 달도 채 안 돼 기록이 돌연 멈춘 것이다. 많은 팬들은 그래서 “기록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서야…”라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게 애초에 이 기록의 ‘운명’이었던 것을.
“다시 시작해야죠.”
그는 이제 그렇게 홀가분하게 말한다.
“첫날은 충격이 컸죠.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충격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는 정말 ‘거짓말’처럼 별 생각이 없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어쩌면 그건 최태원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건 자기 최면인지 모른다. 기록이 멈춘 날 저녁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었던 새 각오처럼.
“비록 연속경기 출장 기록은 여기서 막을 내렸지만 최태원의 야구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 힘이 다할 때까지 야구를 할 것이며, 내일부터는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매 경기에 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후 주전으로 못 뛰는 건 물론 많은 경기에 출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와 2루수 경쟁을 벌이는 다른 선수가 컨디션을 회복하면서 그의 설자리는 더 좁아졌다.
“요즘 좋은 책 한 권을 읽고 있습니다. 기록이 깨진 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보기 시작한 책이죠.”
요기 베라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포수가 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책이다. 그는 책 속의 이런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야구는 긴 항해다. 시즌은 밤낮으로 계속된다. 제 아무리 형편없는 게임일지라도 마지막 반전의 기회가 있는 게 야구다. 만약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믿기만 한다면 그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는 게 바로 야구다.”
야구 대신 ‘인생’이라고 한들 뭐가 다르랴.
▼기록달성 위기의 순간▼
최태원이 1000경기 연속 출장을 해냈을 때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강타자였던 장효조는 “어떤 기록도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경기력으로 이루는 기록들이야 컨디션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만들 수 있지만 연속 출장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는 선수는 홈런왕이나 타격왕이 아니다. 2632경기 연속출장의 기록을 가진 철인 칼 립켄 주니어였다. 그만큼 연속경기 기록이 어렵다는 증거이다.
지난 7년간 최태원에겐 많은 고비가 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96년 LG 투수로부터 공을 왼쪽 손목에 맞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손이 너무 부어서 글러브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가 돼 주사를 맞고 뛰면서 이를 악물었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끔찍해요.”
98년엔 팔꿈치 부상으로 1년을 고생했다. 그럼에도 경기에는 계속 나갔다. 경기 외적인 이유로 중단될 뻔한 고비도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2000년 초 소속팀 쌍방울이 해체되면서다. 두 번째는 그해 말(비시즌) 선수협의회 집행부 활동을 하던 때다. 그는 선수들 권익을 지키기 위한 협의회의 부회장으로 나서면서 적극적으로 일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맹목적으로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이건 옳은 일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옳다고 보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는 팀에서 방출되기까지 했지만 경기장에서 보여준 뚝심 그대로 선수협을 지켜냈고 결국 2001년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선수협 활동에 따른 운동부족 때문이었는지 이후 최태원은 선발 라인업에서 종종 제외됐다. 대타나 대수비 요원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연속출장 기록은 이어졌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