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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박재창/쟁점없는 대선

입력 | 2002-10-01 18:12:00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은 지금 공화 민주 양당 간의 선거전이 치열하다. 이런 가운데 선거 지원차 지난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참석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에 대한 급진적 정책을 부정하면서 점진적 접근의 필요성을 호소력 있게 주문한 결과였다. 그러나 정치평론가들은 고어 전 부통령의 이런 노력이 선거전략상의 실패라고 본다. 자살골이라는 것이다. 민주당이 공화당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이라크와의 전쟁이 타당한 안보전략인가의 여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악화 일로에 있는 미국 경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선거쟁점화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화제로 삼으면 삼을수록 어려운 미국 경제에 대한 유권자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결과가 되며, 이는 바로 공화당 정부가 원하는 바라는 것이다.

▼국정현안 발굴 대안 제시를▼

굳이 이렇게 선거전략 차원에서 논하지 않더라도 선거쟁점을 무엇으로 삼느냐는 선거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다. 선거에 임하는 정치지도자나 정당의 격과 기량을 가늠하는 척도일 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시대정신을 말하는 것이며, 선거가 끝난 후 그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예견해주는 표시등과도 같기 때문이다.

선거쟁점은 선거의 몸통쯤에 해당되는 셈이다. 선거를 통해 누구에게 나라 경영의 책임을 맡길 것인가를 정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사회가 당면한 최대 현안 과제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일이 보다 더 중요한 탓이다. 더군다나 제왕적 권위를 지녔다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선거쟁점에 따라 당선된 대통령이 유념하게 될 정책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대통령의 권한이 큰 만큼 그에 따른 영향도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월 대선을 앞둔 우리의 정치권에서는 자살골은 고사하고 골 자체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호소력 있게 우리의 당면과제를 정리해서 선거쟁점화하는 격과 기량을 지닌 후보가 없기 때문일까. 그냥 상대방을 깊게 태클하거나 손가락질하는 것만으로 영일이 없다. 그 결과 누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경쟁이 처음부터 이뤄지지 않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서로 면해주는 선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이라면 대통령 선거를 왜 치러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돈 많이 드는 선거를 탓하지만 이런 식의 선거라면 선거 자체가 과비용의 지출일 뿐이다. 이번의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우리 사회가 어느 면에서 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비전과 기대치를 계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로부터 평생을 두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고뇌한 끝에 어쩌지를 못하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절실함과 진지함이 배어 나는 절규를 듣고 싶다.

형편이 이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번 선거는 매우 쉬운 선거다. 어느 누구든 자살골이라도 넣으면 기립박수가 터져 나올 판이다. 미국처럼 결정골을 찾아 예리한 슛을 날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다만 선거의 격을 바꾸는 일만이라도 앞장서 나서준다면 일어나 손뼉치고 싶은 이가 한둘이 아니다.

▼선거쟁점 개발도 능력이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현안 과제가 산적해 있다. 교육문제, 경제성장문제, 안보통일문제, 정치개혁문제, 환경보전문제, 미래사회관리문제 등 손만 들면 마음에 와 닿을 과제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중 어느 것 하나라도 골라내어 선거쟁점화할 수 있는 기량과 진지함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가 바로 당선자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유권자는 어제의 신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삿대질이나 구경하면서 박장대소하던 구경꾼의 시대는 지나갔다. 아니 국정현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진지하게 나라를 걱정하는 정치지도자의 등장에 허기지고 굶주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선 후보 평가의 주요 척도는 바로 선거쟁점 개발능력에 있는 셈이다. 누가 자신의 철학을 이 시대의 선거쟁점으로 설정하는 일에 성공할 것인가. 이 점을 우리는 앞으로 두 달여 동안 진지한 눈으로 지켜보아야 하겠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미국 버클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