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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논설위원칼럼]김장권/침략과 납치 같은값 아니다

입력 | 2002-10-03 17:56:00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냉전체제가 와해된지 10년이 지난 한반도에는 아직도 냉전의 얼음이 녹지 않고 있다. 한국은 냉전시절의 적이었던 중국 러시아와 수교를 하였으나 북한은 미국 일본과 적대적 대립을 지속해 왔다.

그런 북한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북한의 개방, 동북아 국제질서의 전환에 결정적 영향을 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비록 경제불황을 겪고 있다고 해도 일본은 여전히 북한의 개방과 시장화에 막대한 자본을 동원할 수 있다. 북한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되려면 일본과 연계하지 않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北-日 두 사안 연계 말아야▼

북한과의 수교는 일본의 국가이익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이 세계적인 정치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우선 아시아에서 리더십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북한과의 수교를 통해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 평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 일본의 리더십은 새롭게 평가받을 것이다. 북한과의 수교는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에서 남은 숙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21세기에 와서도 20세기의 전후처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평화국가’ 일본으로선 큰 부담이다.

더구나 북한이 일본 안보에 위협요소로 남아 있는 한 일본 국내에서 군사대국화 노선과 우익 국가주의 세력을 견제하고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에 평화와 안보를 정착시키고 지역경제의 통합과 번영을 위해서, 그리고 세계적인 정치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일본은 북-일 수교가 필요한 것이다.

그동안 일본은 이러한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핵무기와 미사일 등 안보문제, 납치와 같은 인도적 문제 등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냉담한 입장을 보여왔다. 북한과 일본간에는 인적 연결고리도 없었고, 일본 재계도 1965년 한일협정 때와는 달리 북-일 수교에 소극적이었다. 사회적 인프라도 신통치 않고 정치적으로 폐쇄된 북한시장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별한 정치적 결단이 없이는 북-일 관계가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바로 그러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과감한 결단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미래지향적인 이정표가 세워졌다고 보아 무방하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은 과거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 김 위원장의 납치 문제에 대한 사과가 있은 다음에야 회담이 성사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회담 직후부터 일본열도는 납치 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소요에 휩싸였다. 북한측이 부인해오던 납치행위가 사실로 판명되고 피랍자 중 8명이나 사망한 데 대해 일본 사회는 격분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전쟁과 침략에 대한 반성에 지극히 인색한 일본이 자국민 희생자 몇 명에 대해서 그토록 법석을 떠는 데에 냉소적인 시각도 많다.

물론 과거에 일본이 만행을 저질렀으니 북한이 만행을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용납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거꾸로 북한이 납치 만행을 저질렀으니 과거의 만행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보상 책임도 그만큼 가벼워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잘못이다.

▼과거 반성-합당한 보상 필요▼

과거 침략적인 일본인들이 저지른 피해가 훗날 무고한 일본인들의 납치나 죽음을 통해 보상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본이 납치문제를 규탄한다고 하여 그 대응으로 과거 일본의 만행을 들먹이는 태도나, 일본이 납치문제를 자신의 과거사 사죄나 보상 문제와 연계시켜 슬쩍 넘어가려는 태도 모두 경계되어 마땅하다. 두 문제는 별개 사안이며 완전히 분리되어 논의돼야 할 대상이다.

북-일 정상회담은 두 지도자가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게 사과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양국 관계를 본격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남은 과제는 그러한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두 나라가 더욱 철저하게 반성하고 합당한 보상과 책임있는 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깊을수록 미래를 향한 보폭은 그만큼 넓어질 것이다.

김장권 서울대 교수·정치학 jkk@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