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GO!주말시대]브리지, 동전 한푼 안드는 '두뇌도박'

입력 | 2002-10-03 18:01:00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브리지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게이머들. 마주보는 이들 사이에 '마음의 다리'가 놓여져야 한다는 뜻에서 '브리지'다. - 전영한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 2층에선 카드 게임인 브리지를 즐기는 모임이 열린다. 브리지를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든 참석할 수 있다. 참가비는 1만원.

9월26일 오후 7시 디렉터가 게임 시작을 알리자 룸이 일순 고요해지며 테이블마다 긴장이 감돈다. 얼핏 보면 도박장 같지만 돈은 동전 한닢 오가지 않는다. 깨끗한 두뇌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테이블마다 동-서, 남-북향으로 앉은 2명이 같은 편. 게이머들은 대부분 무표정한 포커페이스지만 ‘내가 구상하는 승부수를 건너편 내 파트너가 눈치 챘으면’ 하는 갈망이 언뜻언뜻 지나간다. 이날은 프로바둑 9단인 김수장 기사와 브리지 강사인 신의민씨 팀의 표정이 좋다. 게임이 잘 풀리기 때문이다. 중반에 약간 고전했지만 결국 3시간여의 게임 끝에 이 팀이 1등을 차지했다. 가벼운 박수가 터진다.

브리지 입문 25년째인 한홍섭 단암전자 회장은 이날 ‘꼴찌에서 2등’을 했다. 컨디션이 안 좋았다. 그래도 그는 머릿속의 암실에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추리 영화 한편을 보고 난 것처럼 개운하고 시원한 표정이다. 그는 늦은 밤 게임룸을 나서며 한마디한다. “이게 세계 최고 게임이에요. 덩샤오핑도, 빌 게이츠도 매료됐죠.”

브리지는 고도의 두뇌 게임이라 룰도 상당히 복잡하다.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입문자 100명 가운데 5년 후에도 이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은 25명 수준이란다.

브리지 게임은 52장의 카드를 4명이 똑같이 나누면서 시작한다. 게이머들은 손에 쥔 13장의 카드로 얼마나 트릭 수(점수)를 딸 수 있는가 공표한다. 이를 비딩이라 한다. 비딩을 통해 자기 카드를 마주보고 있는 파트너에게 암시하고, 상대가 쥔 카드도 짐작한다.

게이머들이 돌아가며 1장씩 내는 카드 4장이 1트릭이 된다. 앞 사람이 낸 카드와 그림이 같으면서 단위가 높은 카드를 내면 그팀이 한 트릭을 이기게 된다. 스페이드와 하트로 게임(메이저)을 했으면 30점, 다이아몬드와 클럽(마이너)은 20점을 얻게 된다. 52장이 다 없어질 때까지 게임은 계속된다. 더 큰 ‘먹이’를 위해 상대보다 높은 끗발을 갖고 있어도 져주기도 한다. 상대 팀을 교란 방해하는 것이다. 내는 카드를 보고 상대방과 팀원의 패를 정확히 읽어야 이길 수 있다.

이 묘미 때문에 제대로 입문하면 대부분 광(狂)이 된다. 한홍섭 회장은 3년 전부터 회사 이름을 내걸고 ‘단암컵 브리지 대회’를 열고 있다. 두산오토의 권형석 사장은 서울 청담동의 자택이 자리한 건물 지하에 아예 ‘청담 브리지 회관’을 차렸다. 그는 “젊을 땐 스트레스가 하도 쌓여 마작을 했는데 브리지를 배운 다음에는 마작을 쳐다보지도 않게 되더라”고 말했다.

기록상 가장 오래 전에 브리지 게임을 한 한국인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인 안젤라 안씨다. 해방 후 한국으로 들어와 브리지를 주위에 권했다. 국내에 브리지를 제대로 알린 이는 올해 봄 작고한 한국 귀화 1호 미국인이자 천리포 수목원의 창립자 민병갈(미국명 칼스 밀러)씨다.

9월26일 게임을 마친 건축사 윤요현씨는 “성균관대 공대 시절 정일섭 현 성균관대 교수 등 친구들과 함께 민씨의 양아들인 구연수씨로부터 브리지를 배웠다”며 “당구비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고스톱보다 훨씬 고급의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작가 한정희씨는 “이 게임이 ‘브리지(Bridge)’라고 불리는 건 테이블에 동-서, 남-북향으로 마주 앉은 2인 1조의 마음을 카드가 ‘다리’처럼 연결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이름 때문인지 브리지가 열리는 곳은 사교장 역할을 톡톡하게 해낸다. 국내 외교관들의 부인들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외교안보연구원과 방배동 외교협회에서 만나 브리지를 하곤 하는데 이 게임 하나만 익혀놓으면 외국에서 낯선 이들과 안면을 트는 데 “딱”이라는 것이다. 국내 브리지계의 대표적 강사 중 한 사람인 신의민 기산 패밀리 이사는 서경대 러시아어 강사였던 러시아 출신 부인 율리아 신씨와 사귀던 90년대 중반 브리지가 그야말로 ‘가교’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국내 정상급 프로 기사들도 브리지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김수장 조훈현 서능욱 백성호 9단이 신의민씨로부터 배워 입문했다. 기사들은 바둑의 수(手)는 무한대지만 브리지의 수는 약 6억개 정도일 것으로 본다. 김 9단은 “바둑과 브리지는 수학적인 두뇌플레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며 “하지만 브리지의 경우 파트너끼리 마음이 통해야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브리지 입문에는 강의를 듣는 게 첩경이다. 신의민씨는 매주 월요일 오후 1시20분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문화센터에서 강의한다. 3개월 10회 정도 나가면 입문할 수 있다. 3개월 9만원, 02-3479-1530. 한국브리지협회 강의도 있다. 02-3445-3847, www.kcbl.org

권기태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