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호씨는 '국제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찬 젊은 열정'이라고 말했다. - 유엔본부=홍권희특파원
《‘한국은 좁고 세계는 넓다.’ 지구촌 곳곳에서 세계화를 몸으로 보여주는 한국인들이 많다. 긴장이 감도는 분쟁지역, 새로운 국제규범을 만드는 국제회의실에도 어김없이 그들은 있다. 유엔은 물론 점차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국제기구 등에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는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이 젊은 한국인의 새로운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이들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2일 오후 뉴욕 맨해튼의 유엔본부 사무국 건물 33층. 차기호(車起鎬·36)씨는 책상 오른편 사진 속의 세 살난 쌍둥이 아들과 눈 맞출 시간도 없이 바쁘다. 당장 챙겨야 할 화급한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한스 블릭스 유엔무기사찰단장이 이라크측과 무기사찰 재개에 합의한 내용, 미국이 마련한 유엔결의안 초안, 관련 언론보도 검색…. 그가 바로 유엔 사무국의 정무국(DPA) 서아시아과 내 이라크 문제 전담자다.
“3일 블릭스 단장이 합의내용을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하기에 앞서 코피 아난 사무총장 등 간부들이 사무국 입장을 정리할 수 있도록 보고자료를 만드는 중입니다.”
그는 일복이 많다. 이라크 외에 중동도 다른 2명과 함께 맡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담당하던 작년엔 전쟁을 겪었다. 아난 총장이 지난달 12일 총회연설에서 꼽은 ‘세계 4대 분쟁지역(이라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파키스탄)’이 공교롭게도 모두 차씨가 소속된 과(課)의 업무다.
“안보리의 공식 비공식 논의가 이번 주말부터 다음주까지 줄지어 있어 야근과 주말근무가 잦겠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 힘들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안보리의 이라크 관련 회의에 사무국 요원으로 배석해 논의내용을 기록하고 이사국들의 자료 요청에 응하면서 아난 총장에게 정책자문을 하는 것의 그의 주업무. 아난 총장의 연설문이나 아시아 주요인사 접견 준비에도 간여한다.
차씨가 어릴 적 꿈대로 유엔에 첫 출근한 것은 1998년 9월. 유엔 사무국 전문직원을 공채하는 ‘국가별 경쟁채용시험’을 통해 1993년 합격증을 받았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 5년을 기다려야 했다. 직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 노트르담대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로서 한국에 이어 미국 로펌에 근무하면서 거액의 연봉을 받기도 했다.
“사무국에서 올린 정책건의가 채택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지요. 그렇지만 유엔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해 분쟁지역 주민의 어려움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인권이 확대되는 것을 보면 뿌듯합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근무하던 부친 차시화씨를 따라 4개국에서 학교를 다닌 그는 일찌감치 유엔을 미래의 일터로 점찍어 놓았다.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차씨는 유엔무대에서 많이 쓰이는 프랑스어를 1년반 째 공부 중이다.
유엔본부〓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국가별 경쟁치용시험이란▼
유엔이 실무직원(P1∼P3급) 채용시 유엔예산 분담액에 비해 직원수가 적은 나라의 국민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 현재 한국은 직원을 더 뽑아야 하는 나라로 분류돼 있다. 모집분야 및 채용직급은 매년 달라진다. 유엔 사무국이 출제 등을 종합 관리하고 각국 정부는 홍보 및 행정편의를 제공한다. 1차는 필기, 2차는 인터뷰와 오럴 프리젠테이션이다. 합격자 리스트를 보고 유엔의 해당과에서 “함께 일하겠다”고 선택해야 입사절차가 진행된다. 2002년 시험 1차 합격자 발표는 이미 나왔고 2003년 시험은 9월 20일 접수 마감했다.
채용 및 시험정보는 유엔사이트(www.un.org/Depts/OHRM/examin/exam.htm)와 외교통상부 사이트(www.unrecruit.go.kr/index.asp)에 있다. 한국인은 1992∼97년 중 28명이 합격해 현재 20명이 각 유엔기구에서 근무 중이다.
▼차기호씨는▼
▽1966년 서울 출생
▽살아온 곳:한국 일본 파나마 미국 오스트리아
▽학력:오스트리아 빈에서 고교 졸업, 미국 코넬대(국제관계학), 조지타운대 석사(국제법), 노틀담대 로스쿨(변호사 자격 취득)
▽경력:서울과 시애틀의 로펌에서 4년간 근무, 유엔 정무국 서아시아과 근무(P2직급으로 입사해 작년 P3로 승진. 전문직원 직급은 P1에서 P5까지 있으며 4∼5년마다 직급 승진 가능)
▽유엔 지원 동기:“국제무대에서 전공을 살려가며 일하고 싶었다. 한국이 유엔에 가입한 1992년 첫 채용광고가 나와 지원했다. 당초 법무직을 희망했으나 한국인은 뽑지 않아 정무직을 지원했다.”
▽근무여건:“시간을 가리지 않는 긴급회의도 많지만 출퇴근이 일정한 편이고 주말도 즐길 수 있다. 로펌 근무 때보다 일하는 시간은 적어졌고 시간당 보수는 더 많다. 업무에서 보람을 느낀다.”
▽향후계획:“정년(62세)이 되는 2028년까지 유엔에서 일하기로 계약했고 그렇게 할 생각이다.”
▽유엔 지원자에 대한 조언:“프랑스어는 국제무대에선 영어와 함께 필수 언어다. 인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유엔 사무국 일이 짜증스러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