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동안 한 곳을 지키며 자전거포를 운영해온 고병태씨의 미소는 마치 자전거를 처음 타는 소년처럼 환하기만 하다. - 이훈구기자
가을 햇살이 따가운 2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 부근 기차가 지나가는 골목의 허름한 건물에 중고자전거가 줄지어 있었다. 기름때 잔뜩 묻은 자전거 부속품과 타이어, 베어링…. 안으로 들어가 주인아저씨를 찾았더니 깡마른 작은 체구에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나왔다. 고병태(高炳泰·75) 옹. 10년, 20년도 아닌 무려 40여년을 이곳에서 자전거 수리를 해왔다. 1929년 3월 전북 군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가 자전거 수리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4년.
“자전거 수리 기술을 배우면 먹고 살 수 있고 군대에도 안 끌려간다고 해서 일본인에게 매를 맞아가며 5개월 정도 배웠지. 펑크 때우기, 타이어 갈기, 각종 부속품 갈기, 용접….”
그는 만만해 보여도 자전거 고치는 데 100여가지 기술이 사용된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특히 그는 용접 실력만큼은 국내에서 최고라고 자부한다.
“20년 전에는 부산의 한 주물공장에서 쇠를 녹이는 용광로에 구멍이 났는데 용접 기술자들이 때우지 못해 결국 나를 불렀어. 비행기표까지 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려가 실력 발휘를 했지.”
1953년 군에서 제대한 그는 고향인 군산에서 자전거포를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이 없어 망했다. 그 뒤 자전거가 많다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1959년 가을 바로 지금 이곳에서 그의 자전거 인생이 시작됐다. 골목 길거리에 앉아 연장통 하나 들고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자전거를 고쳤다. 그의 실력이 소문나면서 손님도 늘고 돈도 좀 모이기 시작했다. 아내 조정애(趙貞愛·70)씨는 보조 역할을 했다. 2년 뒤 지금 가게가 있는 땅 12평을 샀다.
“자전거 수리의 전성기는 50, 60년대야. 특히 6·25전쟁 직후에는 오토바이도 거의 없어 자전거가 지금의 자동차보다 더 귀했지. 또 고장은 얼마나 잦은지 손이 모자랄 정도였어. 아무리 망가져도 버리지 않고 수십 번씩 고쳐 탔으니까. 중고자전거는 없어서 못 팔았고….”
70년대 들어 오토바이가 등장하고 자동차 시대가 열리면서 자전거 수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 동네에 서너 개씩 있던 자전거포는 문을 닫았고 대신 오토바이점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자전거 수리를 끝까지 고집했다.
“요즘 사람들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 펑크만 때우면 멀쩡한 새 자전거를 그냥 버려. 중고자전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10만원씩 하는 새 자전거만 고집하지.”
그에게는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있다. 15년 전부터 앓아오던 당뇨에 합병증까지 겹쳐 펑크 때우기만 해도 팔목이 쑤시고 다리가 아파 자전거 수리를 그만 둬야 할 형편이다.
“내가 죽으면 단골 손님들은 어디 가서 자전거를 고치지….”
이호갑기자 gd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