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이면 각 초등학교에서는 연중행사인 ‘가을 대운동회’가 열린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이맘때가 바로 그런 시기다.
며칠 전 둘째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는데 예전과는 색다른 광경이 눈길을 끌었다.
운동회는 누구에게나 어린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은 디지털문화의 홍수 속에 이런저런 볼거리와 이벤트에 밀려 그 의미와 가치가 크게 축소된 듯한 느낌이다.
그렇기에 아이가 운동회를 위해 열심해 연습한 정성을 생각해서 그리고 ‘꼭 와야 한다’는 아이의 신신당부 때문에 나처럼 별 관심없이 관중석에 앉은 부모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관람을 하면서 의외로 새로운 느낌과 감흥을 받을 수 있어 흐뭇한 하루가 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흔히 ‘운동회’하면 떠올릴 법한 펄럭이는 만국기나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시끄러운 마이크도 없었다.
청백팀을 구분하려고 운동회 때만 잠시 쓰고 마는 머리띠도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은 월드컵 때 이미 장만해 둔 붉은색 티셔츠와 학교 체육복으로 청백팀을 구별했다.
어른들의 흰 티셔츠에 벨트를 해서 원피스처럼 입고 긴 양말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끝부분을 어깨 뒤로 늘어트린 1∼2학년의 무용복장은 깜직하면서도 특이했다. 굳이 새로 구입하지 않고도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한 알뜰함과 창의성을 엿볼 수 있었다.
초청된 내빈들도 운동회가 시작되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던 예전과는 달리 체면치레 없이 적극 운동회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나이 지긋하신 여러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이어달리기에 몰입하는 모습은 아이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6학년 학생들의 ‘손님 모시기’ 경기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을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쉽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모자를 쓴 할아버지를 찾아 울상이 된 채 관중석을 헤매는 아이를 비롯한 안경을 쓴 할머니, 아주머니, 선생님, 동생 등 쪽지에 적힌 사람을 찾아내 골인지점까지 함께 뒤는 이 경기는 운동회의 압권이었다.
운동장 한 켠에서는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대∼한민국!’을 외치는 아이들의 함성이 내내 끊이지 않았고 관중석에 앉은 학부모들도 박수로 응원했다.
운동장 한 가운데서 잇따라 펼쳐진 아이들의 깜찍한 무용과 아기자기한 경기들은 근래에 보기 드문 흥겨운 잔치판이었다.
운동회가 막바지로 접어들 때쯤 관중석에 앉은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참여하는 운동회’를 만들기 위해 학교측이 보여준 세심한 배려에 큰 박수를 보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 아이의 기념사진을 찍을 생각으로 한창 무용이 펼쳐지고 있는 운동장 한가운데에까지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일부 학부모들의 욕심이었다. 올 가을 펼쳐질 모든 운동회가 바빠져만 가는 부모들과 영상문화로만 빠져드는 아이들이 공감대를 이루며 아름다운 가족 간의 추억을 만드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미향 37·가정주부·부천복사골문화센터 독서논술토론강사 mhparklj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