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윤기씨는 여행내내 답사단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지금부터 BC니 AD니 하는 연대와 신들의 계보는 다 잊어버려라. 장엄한 신전을 만나면 아낌없이 감탄하고, 그저 올림피아의 신들에 취해서 지내자. 그리고 내 마음 속의 성스러운 곳은 어디인지 그곳을 어루만지듯이 생각해보라”고. ‘신들의 나라’를 마음으로 느껴보라는 주문이었다. 사진제공 웅진닷컴
《“3년전에 그리스 로마를 찾았을 때는 깜깜한 어둠 속을 혼자 다닌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책을 펴내고 이번에 독자들과 함께 다시 찾으니 우군이 많이 늘어난 느낌입니다.”
국내에 폭발적인 신화 열풍을 몰고 온 이윤기씨. 그는 26일부터 10월3일까지 독자들과 함께 그리스 이탈리아의 고대 도시들과 박물관을 돌아보고 왔다.
이번 답사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1권 100쇄 돌파와 2권 발간을 기념해 웅진닷컴이 마련한 행사. 두 책은 합쳐서 95만부 정도 나갔다. 독서감상문대회와 퀴즈응모행사에서 뽑힌 대학생과 교사, 화가 등 독자들이 작가와 함께 길을 떠났다.》
#델포이-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70km 떨어진 산 속에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성지인 델포이가 있다. 태양신 아폴론이 이 곳에 사는 퓨톤을 물리친 뒤 아폴론 신전이 세워졌고 그 안에 옴팔로스(배꼽이라는 뜻)라는 대리석이 놓여졌다. 이 곳은 ‘지구의 중심’이라 하여 ‘대지의 배꼽’이라 불렸다.
“얼마 전 몽골과 중국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중국 왕권을 상징하는 용이 거머쥐고 있는 천구의 모습이 델포이박물관에 있는 옴팔로스과 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앞으로 동서양 신화가 부딪치는 접점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아폴론 신전 앞에서 그는 혼자말처럼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말로 유명해진 ‘너 자신을 알라’는 이 신전의 박공에 새겨진 문구였지. 그 말은 ‘너는 인간이야. 때가 되면 죽어, 운명에 박박 기어오르지마’라는 뜻은 아닐까.”
#아크로폴리스-신화를 보았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 신전이 우뚝 서있다. 전쟁과 지혜의 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이기도 한 아테네 여신을 모시던 곳. 이씨는 96년 처음 그리스를 찾은 이래 다섯 번째 찾아오지만 올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난 이곳에서 신화를 보았습니다. 그리스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죠. 처음 올 때부터 마치 천 번 이상 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화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메두사 신화도 그 중 하나. 누구든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한다.
그러나 페르세우스가 반짝이는 방패에 메두사를 비추자 그는 자기 얼굴을 보고 돌이 되어버린다. ‘자기 파멸의 씨앗은 자기 안에 있다’는 뼈아픈 진실. 3000년전이나 지금의 우리 삶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그는 강조한다. ‘신화를 아는 일은 인간을 미리 아는 일이다. 신화가 인간이해의 열쇠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이해의 열쇠가 신화라면 신화이해의 열쇠는 상상력이다’.
#코린트와 에피다브로스
-너는 너 혼자가 아니다
코린트의 아폴론 신전.
에게해를 끼고 있는 항구 코린트.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아래 아폴론 신전의 돌기둥이 서있다.
“여기 오면 ‘너는 너 혼자가 아니다. 인류사의 축적이다’이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 실감납니다. 이 곳을 거닐던 알렉산더대왕과 디오게네스를 만나는 기분이 들죠.”
에피다브로스는 고대인들이 치료받던 종합병원터와 같은 곳. 이 곳에 있는 원형극장을 찾은 그는 ‘케 세라 세라’라는 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고대인이 ‘신탁’을 구하듯, 예언과 점복에 기대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The future’s not ours to see’-미래는 우리 몫이 아니죠.”
#로마와 나폴리
-그리스를 이겼지만 문화적으로는 동경했다
바티칸 박물관 앞.
이탈리아의 로마와 바티칸, 나폴리의 박물관에 가면 고대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뛰어난 미술작품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작가는 그리스 신화의 풍요로움에 로마가 덧붙인 것은 없다고 잘라말했다.
“로마는 수준높은 그리스 신화에 물줄기를 대기 위해 신화를 수입해 이름만 바꾸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를 힘으로는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 종속된 셈이죠.” 세계를 정복한 나라답게 군사와 전쟁을 주관하는 마르스를 떠받들었다는 점이 특징.
인문학을 접해본 사람들은 안다. 신화는 구들장과 같다는 것을. 모든 것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구들장에 불을 때왔고, 덕분에 신화의 의미와 재미를 깨닫는 인구가 급증했다.
“나는 신화해석학자가 아니에요. 내 식으로 전달했을 뿐입니다. 신화는 그리스만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유산입니다. 나는 신화를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같이 따먹는 작업을 하는 셈이죠. 이번에 함께 온 독자들이 나보다 더 책 내용을 줄줄 꿰는 것을 보고 전율을 느꼈습니다. 신화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원형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만큼 세계로 통할 수 있는 큰 자산을 얻는 것이죠.” 삼국지, 초한지가 우리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어있듯 신화도 우리 것화 되길 바랍니다.”
2000년 6월에 책을 펴냈지만 그는 25년 동안 ‘내 식대로 신화읽기’를 꿈꾸어왔다. 왜 그토록 신화에 끌렸던 것일까. “신화는 고대인의 이야기지만 우리 마음자리를 적시는, 삶의 바닥을 흔드는 이야기만 축적된 것입니다. 문학은 신화의 영원한 패러디이죠. 패러디가 세월을 이겨내면 신화가 됩니다.”
아테네·로마〓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