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달러 대북 비밀지원 의혹’과 관련해 한광옥(韓光玉)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엄낙용(嚴洛鎔) 전 산업은행 총재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사건의 핵심 쟁점은 산업은행에서 대출된 4000억원이 실제 북한에 전달됐는지 여부이다.
한 전 실장은 엄 전 총재가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이근영(李瑾榮·현 금융감독위원장) 전 산업은행 총재에게서 ‘한 전 실장이 전화로 지시를 해 대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 증언을 문제삼아 검찰에 고소했다.
따라서 검찰은 엄 전 총재가 한 증언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히기 위해 한 전 실장이 이 금감위원장에게 대출 지시를 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 검찰은 한 전 실장이 대출 지시를 해야 할 배경이 있었는지를 조사하는 게 불가피하며 이와 관련한 사실 관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대출된 4000억원의 행방에 수사의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면 수사기법상 4000억원의 흐름을 추적하기 위한 계좌추적도 불가피하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의 장남 정연(正淵)씨의 병역면제 의혹 사건이 김대업(金大業)씨와 한나라당간의 명예훼손 맞고소 사건이지만 수사가 정연씨의 병역면제 과정 전반을 대상으로 진행돼 온 것과 똑같은 논리에서다.
서울지검의 한 간부는 “이 수사는 4000억원의 사용처를 찾기 위한 계좌추적 위주로 진행될 것이며 그 결과를 가지고 현대상선의 관계자들을 상대로 사용처에 대한 진술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전 실장과 이 금감위원장, 엄 전 총재에 대한 소환 조사는 현대상선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는 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수사를 통해 돈이 북한에 전달된 것으로 확인될 경우 이를 근거로 한 전 실장과 이 금감위원장을 조사해야 수사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수사는 2000년 6월 당시 대북사업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박지원(朴智元·당시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과 이기호(李起浩) 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김보현(金保鉉) 국가정보원 3차장 등을 상대로 확대될 수 있다.
반대로 현대상선이 정당한 사업 또는 이른바 현대그룹의 내분 사태인 ‘왕자의 난’ 당시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재단 이사회회장의 계열사 주식 확보용 등으로 이 돈을 썼다면 ‘대북비밀 지원’이라는 사건의 성격이 갖는 파괴력이 반감되면서 수사가 싱겁게 종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4000억원의 북한 전달 여부와 상관없이 한 전 실장이 산업은행을 상대로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 지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경우 수사는 정권 핵심부가 현대를 비호했다는 세간의 설(說)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갈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여론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 수사 속도를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정치권의 주요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 수사가 정치권의 쟁점이 될 경우 정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이 사건을 특별수사부가 아닌 형사부에 배당한 것도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일단 형사부에서 엄 전 총재가 한 증언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수사를 하면서 시간을 벌고 4000억원이 북한에 전달됐는지를 가리는 내사를 해 단서가 잡히면 특수부가 수사를 넘겨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검찰 내부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본격적인 수사는 대선이 끝난 다음에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