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국회의장(위)이 김석수 국무총리가 김대중 대통령을 대신해 국정에 관한 연설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 서영수기자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은 7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총무단의 간청에 따라 김석수(金碩洙) 총리가 대독한 대통령 시정연설을 용인한 뒤에도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박 의장은 본회의장으로 가기 전 굳은 표정으로 보도진에 “대통령이 직접 시정연설을 하는 것은 국민의 요구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고 말했고, 한 측근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국민과 국회에 대해 신의를 저버렸고 그나마 예의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사태 전말〓오전 7시경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의장실로 전화를 걸어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과 조순용(趙淳容) 정무수석비서관이 9시에 의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못한다는 사실을 전하려 했던 것. 이에 의장실 관계자는 “그 시간에 의장단 회의가 있다”며 방문 요청을 거부했다.
박 의장은 9시 의장단 회의를 열어 “시정연설은 접수하되 총리대독은 거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10시경 각당 총무를 불러 그 같은 방침을 통보했다. 이어 총무들은 각자 당 지도부와 협의한 뒤 다시 박 의장을 찾아가 “시정연설을 거부하면 자칫 국회와 정부가 싸우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는 만큼 이번에는 연설을 듣되 의장이 본회의에서 유감을 표명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요청했고, 박 의장이 이를 수락했다.
▽거부 이유〓박 의장은 7월 취임 후, 인사차 찾아온 조순용 수석비서관에게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요청했고, 청와대 만찬(7월16일)에서도 직접 대통령에게 같은 요청을 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아주 좋은 생각을 하셨다”고 답했고, 박 비서실장은 “그 말은 사실상 수락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는 것. 박 의장은 이달 초 청와대와 행자부에 공식서한까지 보내 대통령의 직접 연설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이날 박 의장이 사회를 거부한다는 보고를 받고 “사전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며 ‘절차상의 잘못’에 대해 박 비서실장을 질책했다.
하지만 박 의장은 “문제의 본질은 대통령이 3개월에 걸친 국회의 정중하고 간곡한 요청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이지, 사전 양해와 관련이 없다”며 여전히 불만을 삭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의장실 관계자도 “청와대가 국회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전날 대변인을 통해 김 총리의 대독방침을 밝힌 것 자체가 국회를 아예 무시한 것”이라며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악습 타파에 앞장섰다는 대통령이 관행을 들먹이는 게 얼마나 권위적이냐”고 반문했다.
한편 국회 의사국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88년 10월 정기국회에서 이듬해 예산안을 제출하며 시정연설을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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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국회 의사국(개원 연설은 제외))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